현암 이을호 선생의 기념관을 건립하자
이을호 박사는 1910년 10월 영광읍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1918년 영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5년 과정을 수료하고, 1923년에 영광학원 중등과에 입학하였다. 2년 후에 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서울로 상경하여 1925년 중앙고등보통학교 2년에 편입했고 1927년 20회로 졸업했다.
중앙고 시절인 1926년 폐결핵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으나 낫지 않자 사상의학 대가인 최승달 선생을 만나 사상의학을 공부했다. 최승달 선생의 권유로 1930년 경성약전에 입학해 일본 한방의학 서적과 ‘한방과 한약’ 등을 연구했다. 이을호는 경성약전을 졸업한 후 1933년에 고향인 영광에 호연당약국(浩然堂藥局)을 개업하고 영광에서 항일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37년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목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6개월 동안 투옥 생활 중 경학(經學)과 다산학(茶山學) 연구에 몰두했었다. 옥중에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전환하였다.
출소 후 지역 선각자들과 함께 1945년 10월 15일 영광민립고등중학교와 영광민립여자고등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지역인재 양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민립학교 설립 시 전답 9만평과 벼 1,000섬을 출연한 데 이어 1969년에도 논밭과 임야 6,000여평을 후학양성에 기증하였다.
민립고등중학교는 현재 영광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 영광공고 등으로 발전했고, 민립여자고등중학교는 영광여자중학교와 영광여자고등학교로 그 맥이 이어졌다.
1948년 현재 전남대학으로 바뀐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 약국장에 취임하였으며,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부터 동양철학 연구에 전념해 강항의 '간양록'을 번역했으며,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을 체계화시켰다. 퇴임 후 국립광주박물관장에 취임해 호남의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고 다산학연구원을 설립, 실학 정신을 고취시킨 영광의 인물이다.
최근에는 베트남과 대만까지 이을호 선생의 사상이 확산되어 각종 국제 학술대회에서 현대 철학을 재정립한 학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제 영광에서도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 이을호 박사를 기념하는 학술단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선생의 사상과 공적을 기리고 그가 남긴 유산을 보여주는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을 우리들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수은 강항 선생에 이어 현암 이을호 선생을 영광의 인물로 승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