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 교수의 철학이야기(367)

우정이 철천지 원수로-데카르트와 파스칼(3)

2025-11-17     영광신문

지난 호에서 파스칼은 저 유명한팡세를 남기고 39세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적수인 데카르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데카르트의 명성이 높아지자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를 개인 교사로 초빙했다. 데카르트는 1649년 가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으로 가서 그곳에서 다음해 211일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死因)은 폐렴이었다. 새벽에 잠이 들어 정오 무렵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그의 생활이 여왕에 의해 방해를 받았고, 이것이 그 몸의 면역 체계를 약화시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스톡홀름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 자크 비오그 신부가 영성체(領聖體, 교회에서의 성찬식과 흡사) 빵에 독극물을 발라 데카르트에게 주었다는 것.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이 가톨릭 국가로 바뀌기를 바랐던 비오그 신부가 데카르트의 불온한사상이 스웨덴 여왕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그러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663년 가톨릭의 본산 교황청은 데카르트의 저서를 금지도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데카르트의 유해는 스톡홀름의 묘지에 묻혔다가 1666년 프랑스로 옮겨져 파리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에 묻혔다. 1792년 유해를 판테옹으로 이장하기 위해 묘지를 발굴한 결과 시신에는 두개골이 없었다. 두개골은 시신을 수습한 스웨덴 근위대장이 따로 보관해오다가 19세기 말 경매에 붙여져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참고로, 위에 나온 판테옹이란 프랑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역대 영웅과 위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1744년 루이 15세가 이곳에 교회를 세운 것이 그 건축의 시초이며 높이 83m, 안 길이 110m, 80m의 웅장한 성당은 30년 후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완성되었다. 혁명 정부는 이 건물의 지하 묘소에 혁명 영웅들을 모시기로 결정했다. 이때 안치된 인물로는 혁명가 미라보(프랑스 혁명기 국민의회의 수장)와 마라, 철학자 볼테르, 사상가 장 자크 루소 등이 있다.

그 후 왕실의 묘와 예배당이 되기도 하였으나 1885년에 빅토르 위고(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대표작으로노트르담 드 파리, 우리나라에서는장발장으로 널리 알려진레 미제라블가 있음)가 안치된 이후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중앙의 돔 천장에 매달린 추는 1849년 물리학자 푸코가 이곳에서 했던 실험을 재현한 것이다. 돔의 높이를 이용해 지구의 자전(自轉,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현상. 이 일로 밤과 낮이 생겨남)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실증한 실험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약 70명의 학자, 정치가, 군인이 안치되었다. 근대에 안치된 유명 인사로는 퀴리 부부(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 특히 퀴리 부인은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 이들의 딸 부부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임)와 문인이며 정치가인 앙드레 말로 등이 있다.

어떻든 데카르트 사후(死後) 12년이 지난 16626, (데카르트의 적수였던) 파스칼은 천연두에 걸린 가난한 가족에게 집을 내주고 누이의 집에 들어가 지냈으며, 같은 해 819일 경련 발작으로 그의 찬란하면서도 고통스럽던 생애가 마감되었다. 사체를 해부한 결과 그의 위장과 중요 기관들이 비정상이었던 데다 뇌에도 심각한 외상(外傷)이 있었다고 한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블러그 강성률철학아카데미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