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의 성자(聖者) 최흥종과 미군 장교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

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2025-11-17     영광신문
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무등산의 성자 최흥종 선생

1966, 광주의 한 장례식에는 무려 10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하여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수많은 인파가 내 일처럼 죽음을 애도했던 사람은 평생을 한센병 환자와 걸인들의 아버지로 살았던 오방 최흥종 선생이었다.

광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며 청년 시절에는 장터의 쇠망치로 불렸던 건달이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자 모든 것을 버렸으며 순검시절엔 의병들을 몰래 풀어주고 3.1운동을 주도하다 14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어느날 피고름을 흘리는 한센병 환자에게 주저함 없이 옷을 벗어주고 말에 태우는 선교사를 보고 충격에 휩싸였던 그는 자신의 땅 일천 평을 내놓아 한국 최초의 나병원을 세웠다.

그 후 나환자 200여명을 이끌고 무려 11일을 걸어서 서울 총독부에 도착해 총독으로 부터 나환자 복지와 함께 한센병 전문병원 건립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고흥 소록도에 나환자 전문병원이 세워지기도 했다.

세속적인 욕망을 끊겠다며 스스로 거세 수술을 감행하고 지인들에게 자신의 사망 통지서를 보내기도 했는데 세상과 연을 끊고 오직 약자들만을 위해 살겠다는 선언이었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찾아와 존경을 표했을 만큼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던 그는 무등산에 집을 짓고 나환자, 걸인, 결핵 환자들과 30여 년을 함께 살았던 무등산의 성자였다.

미군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

1950년 가을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탈환한 서울 거리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로 넘쳐났다.

이 참혹한 광경을 외면할 수 없었던 미군 군목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동료들과 함께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으며 어느새 1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였다.

하지만 1950년 겨울, 중공군이 남하하자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차마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던 블레이즈델 중령은 백방으로 이동 수단을 찾았고 결국 인천에서 제주도로 피난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트럭 한 대로 아이들을 열 차례 넘게 실어 날랐으며 독감과 백일해로 여덟 명의 아이들이 숨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3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했지만 약속된 배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군 관계자들을 설득했으며 결국 일본 오키나와의 미 공군기지에서 수송기 16대가 출동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큰 문제가 남았는데 바로 아이들을 김포공항까지 다시 실어 나를 차량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연히 인천항에 시멘트를 실러 온 미 해병대 트럭 14대를 보고 블레이즈델 중령은 단호히 말했다.

상부의 명령이다. 현재의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김포공항으로 아이들을 옮겨라.

그렇게 아이들은 약속시간 보다 두 시간 늦게 공항에 도착했고 수송기 16대는 이들을 태워 제주로 향했으며, 195012201059명의 고아들이 무사히 제주에 도착했다.

이 작전은 유모차 공수작전(The Kiddy Car Airlift)이라 불렸는데 며칠 뒤 벌어진 흥남 철수작전과 함께 한국전쟁의 두 크리스마스 기적으로 기록되었다.

작전이 끝난 후 블레이즈델 중령은 직권남용과 명령 불복종 죄로 군법회의에 회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재판관들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아니어도 미군 중 누군가는 반드시 그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내 임무가 1000명의 아이들을 죽게 놔두는 것이라면 차라리 지금 저를 파면시키십시오.”

그의 진심어린 답변은 재판장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처벌 대신 명예로운 복귀를 허락받았다.

2001년 그는 다시 한국을 찾아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이 구한 고아들을 만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2007년 세상을 떠나 미 재향군인 묘지에 묻혔다.

그가 남기고 간 낡은 성경책에는 진하게 밑줄이 그어진 성경 말씀 한 구절이 있었다.

너희가 여기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