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 이을호, 재조명 되어야 (2)
곽일순 수필가·사진가
한 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현암(玄庵) 이을호 박사(1910~1998)의 사상은 묵직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그는 학자이면서도 실천가였고, 사유의 깊이와 삶의 현장을 함께 품은 인문주의자였다. 그의 철학은 지식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사유의 중심’을 다시 세우려면, 현암이 걸었던 길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이을호 박사는 일찍이 다산 정약용의 사상에서 출발했다. 그에게 다산은 단순한 실학자가 아니라, 현실을 개혁한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였다. 그는 유교를 도덕의 학문이 아닌, 백성을 살리고 세상을 바로 세우는 실천 철학으로 해석했다. 현암이 다산을 연구한 이유는 과거의 학문을 복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학문은 늘 ‘살아 있는 사유’였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사유의 자립’이다. 현암은 “학문은 외래의 빛이 아니라 우리 안의 등불로 밝혀야 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정신의 독립 선언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지만, 정작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현암은 반세기 전 이미 이 위험을 경고했다. 그는 사유의 자립이 곧 민족의 자립이며,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때 비로소 사회가 선다고 보았다. 지식의 시대일수록, 생각의 주체를 잃지 않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현암이 남긴 또 하나의 메시지는 ‘학문의 사회화’이다. 그는 다산을 통해 학문이 백성의 삶과 이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학문이 현실을 외면하면 그것은 생명력을 잃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해방 이후 고향 영광에 민립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맡았고, 전남대학교 교수와 국립광주박물관 관장을 지내며 지식과 교육, 문화의 현장을 하나로 엮었다. 그에게 학문은 곧 실천이었고 가르침은 공동체의 빛이었다. 현암의 이 같은 정신은 오늘의 교육과 지식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학문이 지역과 공동체를 향할 때, 그것은 다시 ‘살아 있는 학문’이 된다. 그는 또한 ‘한(恨)’과 ‘한(韓)’의 사상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철학을 세계적 언어로 확장하려 했다. 그에게 ‘한’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고난을 견디며 새 생명을 낳는 창조의 에너지였다. 그는 이 ‘한’을 한국인의 사유 근원으로 보고,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윤리를 찾았다. 그의 철학은 국경을 넘어선 보편적 인문 정신으로 이어진다. 자기 뿌리를 깊이 성찰할 때 비로소 세계와 대화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오늘의 한국 사회가 잃지 말아야 할 가치다.
현암의 사상을 계승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사유를 다시 세우는 일이며, 삶 속에서 철학을 실천하려는 자세를 되찾는 일이다. 그가 강조한 사유의 자립, 학문의 실천, 민족정신의 회복은 지금의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길잡이가 된다. 지역의 공동체가 그의 철학을 이어받아 ‘현암 연구센터’나 ‘인문학 시민강좌’ 같은 실천적 문화운동으로 발전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암의 뜻을 가장 온전히 잇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군의 의지와 기반 시설이다. 문화 센터가 지어진다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되겠지만 복합 문화 센터의 꿈은 아직 요원하다. 언제까지 우리 지역이 문화의 빈곤 지역으로 남을 것인지 심히 걱정된다. 이제 행정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을호 박사는 “사람이 서면 나라가 서고, 사유가 서면 시대가 선다”라고 말했다. 그의 삶은 이 한 문장의 증거였다. 그는 책 속에서만 사유한 학자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사유를 실천한 지식인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태도다. 사유하는 시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것—그것이야말로 현암이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