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54년 잃어버린 우리 시를 찾아

海佛庵 落照



뻘건 해

끓는 바다에

재롱부리듯 노니다가



도로 솟굴 듯이 깜박 그만

지고 마니



골마다 구름이 일고

쇠북소리 들린다.





해설



이 시조는 불갑사 암자 해불암(海佛庵)에서 칠산바다 낙조(落照)를 바라보며 찍은 한 장의 스냅 사진이나 다를 바 없다.



초장 “뻘건”이란 말은 음의 강도(强度)를 고려해 쓴 것인데, 조운의 시조에 “빨간”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하여 그의 문학사상까지 붉은 색(좌익)으로 보는데, 그의 육신을 낳아준 사람이 어머니였다면, 그의 정신을 낳아준 것은 조국이었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빨간색이라고 하면 공산주의라고 착각하는 이념의 색맹(色盲)으로 살아왔다. 납북(拉北)이냐 자진 월북(越北)이냐가 옥에 티라면 티겠다.



조운은 시퍼런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목포형무소에서 1년 7개월의 옥고를 치뤘으며, 1929년 1월에는 근대가요 大方家 申五衛將을 신생잡지에 발표, 우리 민족 얼이 살아 숨쉬는 신재효의 판소리에 대한 문화계의 관심을 갖게 한 선각자이며, 해방이 되든 해에는 건준 부위원장직을 맡아 영광복원에 앞장섰다는 그의 발자취(해방이 되자 쫓겨가는 일본인들에게 군민들이 행동을 자제하도록 적극 설득했으며 실제로 지금 남도땅(찻집)자리 친일파 정동윤네 집을 사람들이 몰려가 불지르려 하자 누가 살았건 영광의 재산이니 불을 지르지 못하게 막았다 함)가 너무나 선명하며, 1947년 봄 서울로 이사해 바로 뒤 그의 시조집을 내고, 그 해 동국대에 나가 시조론과 시조사를 가르쳤다는 사실도 그냥 스쳐버릴 수 없다.(조남식 증언)



시골에서만 46년 동안 묻혀 살던 그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얻은 명예와 지위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북쪽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국내 상황에 재삼 장고(長考)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조운이 북으로 넘어갈 때 시골(영광읍)에 계신 그의 어머니를 친척 집으로 올라오라 해 부랴부랴 거길 찾아가니 한발 앞서 떠났더란다.

천하에 둘도 없는 효자 조운이 그 어머니를 기다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갔다는 것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긴급피난 상황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껏 미스터리로 남은 이 부분은 남북평화 무드가 무르익어 통일이 되는 날에는 밝혀지련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조운을 잃어버린 영광 사람들의 상처와 한(恨)은 하나 둘씩 땅에 묻힐지언정 영영 아물지 않을 것이다.



앞에 나온 정동윤(일제때 도의원 역임)은 당시 영광 경찰서장하고 현 영광병원 옆에 있었던 활터로 나막신과 예복을 입고 활을 쏘러 다녔는데 1945년 건준 주비모임에 낯짝 좋게 나타나자 "어이 자네 무드러 여기 왔는가" 조운이 그러드란다.(이경인 증언)







佛甲寺 一光堂



窓을 열뜨리니

와락 달려 들을듯이



萬丈 草綠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꾀꼬리

부르며

따르며

새이새이 걷는다.







해설

이 시조는 가람이 그의 논문 “時調의 槪論”에 인용할 만큼 빼어난 작품이다.



가람 이병기는 1921년 강연회 초청인사로 영광에 왔는데, 이때 기록은 눈에 띄지 않고, 그 후 1927년 7월 27일 영광읍에 와 본대로 느낀 대로 적은 글을 시작으로 여러 군데 영광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조운과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조운보다 아홉 살 위인 가람이 어찌 생각하면 선생 같기도 하고, 달리 생각하면 형 같기도 하다.



사제지간의 정(情)이었건 호형호제지간의 두 사람이었건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였던지 가람은 부안에서 조운 부친 제삿날 10여 년 가까이 멥쌀을 갖고 제사를 지내려 왔다 한다.



(이 두 사람 사이에 후일 조남령이 끼는데 한국 시조문학 삼인방이라 필자는 말하고 싶음)



다시 말머리를 원점으로 돌려 이 시조는 불갑사 일광당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진 5월의 전경을 읊은 것인데, “萬丈草綠이 뭉게뭉게 피어나고”라는 표현으로 봐 정오를 전후한 시점(時點)인 듯 싶다.산들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는 점과 새이새이 걷는다(새이는 사이의 방언 즉 나무사이로)라는 표현에 유의하면 한결 이해가 쉬워지리라 믿는다.



종장 끝머리 표기가 책(복간된 조운시조집)에 따라 다른데 “가람 文選”에 나온 '건넌다'가 원래 표기이다.(뜻은 걷는다) 곁들이고 싶은 말은 조운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싶이한 상태에서 “가람文選”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山寺 暴雨



골골이 이는 바람

나무를 뽑아 내던지고



峯마다 퍼붓는 비

바위를 들어 굴리는데



절간의 저녁 종소리

여늬 땐 양 우느냐.





해설



이 시조는 불갑사에서 광풍과 폭우를 동반한 자연의 위력 앞에 무기력한 인간사를 읊은 것이다.



초, 중장까지는 폭우로 말미암아 삽시간에 뒤죽박죽이 된 불갑사 주변을 말하고, 종장에서는 앞말이 무색할 정도로 표변(豹變)하여 “절간의 저녁 종소리 여늬 땐 양 우느냐”라고 무섭게 질타하고 있다.



몸은 속(俗)을 떠나 아늑한 불갑사에 있지만, 폭우가 퍼붓자 어느새 그의 마음은 자기집으로 날아가 버렸는지, 좌불안석(坐不安席)하는 심경이 종소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졸지에 재앙을 만난 선(仙)과 속(俗)의 입장차이 즉 부조화(不調和)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山 帆



海門에 진을 치듯

큰 돛대

작은 돛대



뻘건 아침 볕을

떠받으며

떠나 간다



지난 밤

모진 비바람

죄들 잊어 버린 듯.





해설



이 시조는 산사 폭우가 있었던 그 다음날 언제 그랬냐 싶게 쾌청한 날씨에 출범하는 바다 위 배를 불갑산에서 바라보고 읊은 것인데, 살아있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해 시여화(詩如畵)라는 말이 실감난다. 초, 중장에서는 칠산바다 위 두개의 섬(海門: 양쪽에 서 있는 섬) 사이로 돛을 단 큰 배 작은 배들이 “아침 볕을 떠받으며 떠나 간다”라고 하고서 종장에서는 지난 밤 악몽 같았던 산사 폭우를 상기 시키고 있다.



폭풍우로 발 묶여 애타던 배들이 이른 아침 잠잠해진 바다 위를 멋드러지게 미끄러져 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水營 울똘목



碧波亭이 어디메오

울똘목 여기로다



當年에 못다 편 뜻

상기도 남아 있어



오늘도 워리렁충청

울며 돌아 가누나.





해설



수영(水營) 울똘목은 전남 진도와 화원반도 수로(水路)로 격류(激流)가 부딪쳐 우뢰같은 소리를 낸다하여 명량(鳴梁)이라고도 하는데, 1597년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과 맞서 대승(大勝)을 거둔 격전지이다.



“碧波亭이 어디메오 울똘목 여기로다” 이와 같이 초장에서 문답식으로 위치를 말하고, “當年에 못다 편 뜻 상기도 남아 있어” 라고 해 중장에서는 그때 왜선(倭船)을 다 쓸어버리지 못한 철천지 한(恨)이 남아 있노라 하고, 종장에서는 “오늘도 워리렁충청 울며 돌아 가누나” 라고 탄식하는데, 이는 울똘목 물살이 소용돌이 치며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워리렁충청은 어안이 벙벙해서 혹은 기가 차서인데, 분을 못 이기듯 소용돌이 치는 물살을 의성어로 표현한 것)

조운이 일본인들한테 분통 터지게 당하고만 살다, 이순신이 세계 해전사상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통쾌하게 박살 낸 승리의 현장에 가면 마음이 좀 풀릴까, 위안이 될까해 찾아갔더니, 지금도 임진왜란이 종료되지 않은 상태(임진왜란 때나 다름없이 일본 지배하에 있음으로)나 다름 없이 저 물도 나와같이 신음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당시 조운의 우국충정과 울똘목 물이 뒤엉켜 피압박 민족의 울분을 들끓게 한다. (일제때 거개의 사람들이 창씨 개명을 했지만 조운은 안했음)



이와 같이 우국충정에 나온 시조가 이 작품 말고도 “古阜斗升山”, “내땅”, “滿月臺”에서, “善竹橋”, “柚子” 등이 더 있다.

(“내 땅” 시조는 “한국농민시” 9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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