滿月臺에서





寧越 子規樓는 봄밤에 오를꺼니

滿月臺 옛宮터는 가을이 제철일다

지는잎 부는 바람에 날도 따라 저물다.

(端宗의 詩 - 奇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松都는 옛이야기 지금은 하품이야

설움도 낡을진대 새 설움에 아이느니

臺뜰에 심은 벚나무 두길 세길 씩이나.







해설

이 시조는 역사의식이 누구보다 투철한 조운이 고려의 수도 송도(개성)를 찾아가 읊은 연시조인데, 영월 자규루(子規樓)는 봄 밤에 올라야 두견새 울음에 구곡간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고, 만월대 옛 궁터는 낙엽지는 소슬한 가을에 찾아가야 망국의 비애를 느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주의를 요하는 곳은 시조 밑에 첨기(添記)해 둔 단종의 한시(漢詩)다.

이 시를 보고 단종을 생각한 나머지 이와 같은 시(시조)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종의 한시는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 사람은 춘삼월에 자규류에 오르지 말라"는 내용이다.

두 번째 시조는 송도가 옛날에는 부귀영화 누리던 궁궐이었으나 막상 와 보니까 그때를 떠올리는 것마저 기운이 빠져 하품만 나온다고.

이제 몇 백년이 지나 망국(亡國)의 설움도 잊혀진 양 느껴지는데, 일본놈들이 조선에 심어논 식민지 사상이 또 새 설움이 되어 아이같이 울고 싶노라고.

종장 “臺뜰에 심은 벚나무 두길 세길 씩이나”를 실제의 벚나무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시적 대상에 대한 실경(實景) 실사(實寫)가 아니라, 식민지에서 날로 번창하는 일본의 국세(國勢)가 송도까지 깊숙히 파고들었다는 고도의 언어 장치이다.

중장 설움의 이유를 벚나무로 보면 쉽게 수긍이 간다.

위에서 보듯 조운은 나름대로 확고부동한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만큼 역사를 반추(反芻)하며 섣불리 비분강개하거나, 영탄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극도의 감정을 자제하며 현재 속으로 과거(역사)를 끌어 들이고 있다.

감정부터 앞세운 시인들은 반이성적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빨려 들어가 허우적거리는데, 그는 과거를 현재로 끌고와 접목(接木)시키고 있다.

('제철일다'는 '제철이로다' 혹은 제철일 것이다. 꺼니는 것이니, 아이느니는 아이이느니)









善竹橋





善竹橋 善竹橋러니 발남짓한 돌다리야

실개천 여윈 물은 버들잎에 덮였고나

五百年 이 저 歲月이 예서 지고 새다니.



피니 돌무늬니 물어 무엇 하자느냐

돌이 모래되면 忠信을 잊겠느냐

마음에 스며든 피야 五百年만 가겠니.



圃隱만한 義烈로서 흘린 피가 저럴진대

나보기 前 일이야 내 모른다 하더라도

이마적 흘린 피들만 해도 발목지지 발목져.







해설



해방후 한때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이 시조는 대화체로 시종일관 되어 있는데, 먼저 이 시조에 얽힌 일화를 알아야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그의 팔촌 여동생 조영순은 당시 개성 호수돈여고생이었는데, 하루는 뜻밖에 조운이 집(개성의 하숙집)을 찾아왔더란다.

마침 여름방학이어서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오빠를 졸라 찾아간 곳이 선죽교였는데, “오빠 오빠 저 선죽교에 지금도 정몽주의 피가 묻어 있을까?”

이렇게 물어보니 그 자리서 답변삼아 읊은 시조가 “선죽교”라 한다.

현장에서 가운데 한 수만 읊고 나머지 두 수는 후일 보탰는지 모르지만 함께 갔던 조영순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이 시조는 1934년 9월 “중앙” 잡지에 발표 되었는데 사실은 일년전(1933년) 여름에 쓴 작품이다.

첫 시조 종장 “오백년 이 저”에서 “이 저”는 현재의 이쪽에서 본 과거의 시공 저쪽인데 조선과 고려를 동시에 아우른 표현이다. 조운의 초일류 언어감각에 유구무언(有口無言)일 뿐이다.

초정 조의현의 말에 의하면 “높고 맑은”을 “높맑은”으로 “여기 저기”를 “여저기”로 “열어젖힌”을 “열뜨린”으로 시어화(詩語化)해 최초로 쓴 사람이 조운이란다.(일종의 스타일리스트)

셋째수는 오백년 전 포은(圃隱) 한 사람이 흘린 피도 역사에 남아 울분케 하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마적(지금으로부터 멀지 않는 시간 즉, 일제 때) 피들만 갖고도 발목이 찰 정도라고 실토하고 있다.



(발목지다 : 발바닥에서 복사뼈까지의 높이) 또 중장에서 “나보기 전 일이야 내 모른다 하더라도”는 꾸끔스럽게 이성계가 고려를 찬탈할 때 흘린 피까지 들먹일 필요없이 덮어 두자고 한 것은, 싹 감추는 척 하면서 살짝 드러내 보이는, 확 축소시키는 척 하면서 확대시키는 조운 특유의 말재간이다.

이 선죽교는 비단 정몽주의 의로운 피에만 국한되는 시조가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에 살다 이 땅에서 의롭게 산화한 모든 영령들께 바치는 단장(斷腸)의 헌시(獻詩)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선죽교



선죽교 선죽교려니 발 남짓한 돌다리야

실개천 여윈 물이 버들잎에 덮였구나

오백 년 이, 저, 세월이 예서 지고 새다니.



피니 돌무늬니 물어 무엇 하자느냐

돌이 모래되면 충신을 잊겠느냐

가슴에 스며 든 피야 오백 년만 가겠니.



포은 만한 의기로써 흘린 피가 저럴진대

나 보기 전 일이야 내 모른다 하더라도

이마적 흘린 피만 하여도 발목지지 발목져.

1933년 원작(原作)









湖 月





달이 물에 잠겨 두렷이 흐르는데

맑은 바람은 漣波를 일으키며

뱃몸을 실근실근 밀어 달을 따라 보내더라.



달이 배를 따르다가 배가 달을 따르다가

뱃머리 빙긋 돌제 달이 櫓에 부딪치면

아뿔사 조각조각 부서져 뱃전으로 돌더라.



풍덩실 뛰어들어 이 달을 건져내랴

훨훨 날아가서 저 달을 안아 오랴

머리를 들었다 숙였다 어쩔줄을 몰라라.













해설



이 시조는 1926년 7월 15일 경에 쓴 暎湖淸調 21편 중 4,5,6번째 해당하는 시조인데, 나중에 제목을 湖月로 바꿨다.

예로부터 영광의 시인 묵객들은 중국 동정호(洞庭湖)와 법성포가 비슷하다 하여, 西湖(영광 서쪽에 있는 호수)라고 표현했다.

작품과 부합되는 장소를 알아보고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그 작품의 분위기와 내용을 파악하는 첩경이 아닐까 싶다.

법성포는 전국 어느 항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 생김새가 마치 목이 잘룩한 병과 같아 물살이 드세지 않다.(병목지형)

이 시조는 첫째 수와 둘째 수에서 물에 비친 달과 그 물위를 가는 배에 대해 실감나게 표현하고, 마지막 수에서는 그 광경에 심취해 어쩔 줄 몰라하는 조운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수 중장 연파(漣波)는 이어지는 물결인데, 그 다음 줄 실근실근이란 말이 재미 있다.

실근실근이란 말은 슬쩍슬쩍이란 뜻의 영광 사투리인데, 조운의 재치있는 표현에서 그의 장난기도 엿볼 수 있다.

조운은 장난도 수준급이이서 시집간 셋째 누나를 "차앙평 누우님(타고난 이야기꾼)은 곰보오딱지"라 골려 먹었는가 하면, 한번은 영광읍 연성리 서순채 생일날 집에 초대받아 단짝 친구들이 모여 점심식사를 하는데, 귀한 조기탕이 한그릇만 나오니까 그 중 한 친구(조용남)가 탁 침을 뱉더란다.











아무리 식욕을 돋구는 조기탕일지라도 침을 뱉어 버렸으니 모두 어안이 벙벙해 서로 쳐다만 보고 있는데, 조운이 조기탕에 수저를 척 집어 넣으며 하는 말이 “애기들 이뻐허다 보면 어른은 침 묻은 것도 먹는다 더라” 욕심 많게 자기 혼자만 독식하려고 꾀를 낸 친구(지도급인사요 수완가)에게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로 일격을 가해 웃음판을 만들었다고 한다.(서단 증언)

이 외에도 조운에 관한 일화가 무수히 많을 터이나 그가 월북하고 3.8선이 굳어지면서 그에 관한 말은 함구령이 되다시피 했다.

1988년에 그의 문학작품이 해금되면서 두 번에 걸쳐 조운 시조집이 복간 되었으나 문화인이나 지성인은 환영하는 기색이지만 6.25를 직접 체험한 영광사람들은 무덤덤한 반응이다.







九龍瀑布





사람이 몇 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劫이나 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玉流 水簾 眞珠潭과 萬瀑洞 다 고

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

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連珠八潭과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해설



이 시조는 조운 시조집에 실린 73편 중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사슬시조(聯珠體의 시조, 엮음 시조)로 된 작품이다.



금강산을 다녀온 뒤 구룡폭포 한편을 얻기 위해 실로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한다.

천하의 절경 앞에 주눅이 든 탓도 있겠지만 이 한편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 짐작할 수 있다.



조운의 시조는 하나같이 일정한 수준과 무게를 지니고 있어, 서로 저울질 해보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이 “구룡폭포” 야말로 엄지가락에 해당하는 으뜸시조다.

그의 시조 중에서도 으뜸이지만 우리 시조문학사에서도 쉽게 그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을 요지부동의 최고봉이다.

1947년 5월 조운시조집이 세상에 나오자 조운시조집을 살펴본 윤곤강은 당시 문단의 실세인 위당 정인보의 “槿花詞” 노산 이은상의 “金剛山”, “朴淵 ”, 최남선의 “檀君窟” 가람 이병기의 “萬瀑洞시” 수주 변영로의 “白頭山 갔던 길”에 정지용의 “白鹿潭“ 등 그 밖의 어떠한 작품을 갖다 대어도 조운의 ”九龍瀑布조“ 한편과 어깨를 겨눌 작품을 보지 못했다고 서슴없이 격찬한바 있다.(시와 진실 182P 1948년 정음사 간행)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이근배가 금강산에 가 구룡폭포와 맞닥쳤는데 “조운의 구룡폭포로 인해 어떤 낱말 하나도 얻어내지 못했다”고 하는 고백이다.

이는 하나의 겸사(謙辭)로 여길 수 있으나 우리로 하여금 구룡폭포 시조를 재인식시켜 주는 경구(警句)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칠산문학 제13호)

이 시조는 삶의 속박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맞닥친 구룡폭포 앞에서 환생(幻生)을 꿈꾸는 간절한 기원시(祈願詩)이다.

조운은 시적(詩的) 대상과 맞닥치면 너는 너, 나는 나 주객(主客)을 구분 짓는 게 아니라 곧장 너와 내가 하나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접신(接神)까지 시킬 줄 아는 천래(天來)의 시인이다.

무엇이든 한눈에 척 알아버리는 직관(直觀)의 달인(達人)이다. 초장에 두 번이나 탄성이 겹치는데 확실한 깨우침 뒤에 나오는 탄성이다.

이미 조운의 마음은 구룡폭포 물이 되어 쏟아지고 있는 듯 하다.





중장에서 수평과 수직으로 시각을 이동시키며 구룡폭포수가 되는 절차를 밝혀 놨는데 물수자와 비우자에 해당하는 글자들의 퍼레이드 같다.

종장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이 대목은 오케스트라 마지막 장면처럼 웅장하면서 비장미가 엄습한다.

현생에 어이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환생해서 기어이 이루고픈 조운의 꿈이 깃들어서 인지 몰라도 ...

주의를 요하는 곳은 중장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되어” 인데 이 모든 것들이 우여곡절과 변화무쌍한 과정(수난)을 거쳐 궁극에는 이슬되어로 귀결된다.

또 위 시조의 핵심어인 이슬과 폭포를 조선인 개체와 전 조선인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조운이 현실에서 꿈꾸었던 대동세계(大同世界)일 수도 있다.

1935년 5월 쓴 원작에는 제목이 구룡연으로 되어있고 “連珠八潭

과 함께“가 ”상팔담에 섞여“로 되어 있다. (連珠八潭 : 연주 위 팔담임)













石潭新吟





一曲이 예라건만 冠岩은 어디 있노

半남아 떨렸으니 옛모습을 뉘 傳하리

흰구름 제그림자만 굽어보고 있고나.



二曲은 배로 가자 花岩은 물속일다

長廣 七八里가 거울 같이 즐편하여

人家도 다 묻혔거든 물을 데나 있으리.



三曲을 찾아 가니 翠屛이 예로고나

松林을 머리에 인채 허리에 배 매었다

夕陽은 無心한 체 하고 불그러히 실렸다.



四曲이 깊숙하다 松崖에 쉬어 가자

架空庵 옛터 보고 凌虛臺로 내려 오며

石泉水 손으로 쥐어 마시는 게 맛이다.



五曲으로 돌아드니 隱屛에 가을일다

聽溪堂 거친 뜰에 銀杏잎만 흐듣는데

布巾 쓴 弱冠 少年은 입벌린 채 보는고.





六曲은 釣峽이라 물이 남실 잠겼고나

兩岸에 늙은 버들 빠질듯이 우거지고

새새이 내민 바위는 釣臺인 듯 하여라.



七曲 楓岩은 깎아지른 絶壁이야

푸른 솔 붉은 丹楓 알맞게 서리 맞아

一千길 물밑까지가 아롱다롱 하더라.



八曲으로 거스르니 물소리 果然 琴灘일다

돌을 차며 뒤동그려 이리 꿜꿜 저리 좔좔

바위를 ?어 흐르다간 어리렁출렁 하더라.



九曲이 어디메오 文山이 아득하다

十里 長堤에 오리숲이 컴컴하다

淸溪洞 淸溪다리 건너 게가 기오 하더라.



高山 九曲潭은 栗谷의 노던 터라

오늘날 이꼴씨를 미리 짐작 하신 끝에

남 몰래 시름에 겨워 오르나리셨거니.







해설



이 石潭新吟은 10수의 연시조인데, 이이(李栗谷) 高山九曲歌와 차별화 하기 위해 新자를 넣어 이렇게 제목을 붙인 듯하다.

石潭(석담)은 황해도 해주 수양산에 있는데 그 경치를 1곡에 9곡까지 나눠 읊고 제10곡은 이이(李栗谷)에 대해 읊고 있다.

이런 풍의 시조가 1925년에 씌어진 “법성포 12경”과 “영호청조”인데 위 석담신음(石潭新吟)도 이 무렵에 쓴 작품으로 여겨진다.

둘째 수 초장 끝 “물속일다”는 “물속이다”이며, 넷째 수 “石泉水”는 손으로 물을 쥐어 마셔도 좋은 일급수이며, 여섯째 수 중장 “빠질 듯이 우거지고”는 “수양버들의 우아한 곡선미”를, 종장 “새새이”는 “사이사이”이며, 일곱째 수 “단풍 알맞게 서리 맞아”는 실제로 서리는 단풍의 붉기와 곱기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렇게 표현 했고, 여덟째 수 종장 끝부분 “어리렁출렁”은 “水營 울똘목”에 나오는 워리렁충청과 비슷한 표현인데,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하며 출렁이는 물소리와 그 광경을 묘사한 말로 봐야 한다.

아홉째 수 “게가”는 “거기가”이며, “기오 하더라”“기다 하더라”.

열째 수 중장 “이꼴씨”는 “이꼴”인데 씨자를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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