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줄-

- 금 줄 -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막내를 출산하셨다. 산파 대신 연세 지긋하신 고모님께서 대야에 따뜻한 물과 가위, 실 등을 준비하시고 분주하게 안방으로 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서둘러 옆집에서 볏짚 한단 얻어다가 새끼를 꼬던 모습 역시 뇌리에 생생하기만 하다. 바로 금줄을 걸기 위함이셨다.

요즈음 아이들의 호적을 살펴보면 출생지가 모모 산부인과가 태반이다. 출산이 다가와도 준비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거의 병원에서 해결이 되고 퇴원 후에 사용할 기저귀, 분유, 옷 몇 벌이면 만사 그만이다. 40대 이전 세대에겐 병원은 언감생심이요, 그나마 산파의 도움도 부유층 집안이 아니고는 꿈도 꾸지 못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낌은 물론 세상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듬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성 싶다.

각설하고 금줄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실 금줄 없이 태어난 사십대 이전 세대가 몇 사람이나 될까를 생각해 본다. 출생과 동시에 가장 먼저 금줄과 인연을 맺으며 세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붉은고추, 청솔가지, 숯 등을 준비해 놓고 왼 새끼를 꼬아서 대문에 내 걸면 온 동네 사람들은 금시 아들인지 딸인지 구분해서 알았고 아무리 친한 사이 일지라도 삼칠일은 발길을 금했다. 금줄은 따로 검줄, 인줄, 감줄이라고도 부르는데 잡것을 금하는 역할도 중요했지만 어찌 그 뿐이겠는가. 몸을 푼 산모가 최소한의 회복기를 갖는데 삼칠일은 필요했을 것이며, 이 경계선은 아이의 건강과 산모의 몸조리를 유지해 주는데 필요한 최고의 성역이었다.잡인 출입이 간단한 금줄 하나로 해결되어 버린 것이다.

남부 지방의 삼신놀이를 살펴보면 아낙들이 삼신 고사상을 차리고 아이들의 복을 빌어주고 일년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또한 삼신 고사상에는 반드시 금줄이 늘어져 있다. 즉, 아낙들과 고사상 사이에는 금줄로 놀이공간과 제의공간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역과 속역을 엄격히 구분한다.

이 금줄 문화가 아직도 깊은 시골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는데 과연 무엇이 이것을 이렇게 면면히 이어가게 하는 것일까? 사실 금줄에 대한 연구는 너무도 빈약하다. 나 역시 금줄 문화를 개요라도 알기 위해서 여러 서적을 뒤져 볼 수밖에 없었고 민속 문화 연구소의 논문에 의지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이 방면에서의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라고 하겠다. 우리 민족 역사와 더불어 이어져 내려온 문화인데도 정작 우리 자신들은 훨씬 이후에 들어온 불교, 유교, 기독교 문화보다도 등한시했고 무시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과연 금줄의 상징성은 무엇이며 의미가 무엇이기에 우리 곁에서 수천 년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일까? 간단히 설명하자면 금(禁)은 금지(禁止)요 그 말대로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데 그 가장 큰 목적이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해서 일상 구역과 신성 구역의 무언의 표시인 셈이다. 그러면 잡인만을 금했을까? 아니다. 잡신(雜神)의 침입을 금하는데도 금줄은 역시 필요했다. 또 한가지 견해는 국학자 이능화선생이 금줄을 감줄로 해석하면서 검, 곰, 한과 같은 고대어와 상통하는 신성어로 여겨 금(禁)이 아니라 '검'으로 보는 견해를 내 놓았다. 역사 민속학자 손진태 선생 역시 '검줄문화'로 표현했으니 그냥 지나칠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감줄의 '감'은 장승. 탑. 당산나무 등에 감아 둔다는 어의로 보기도 하고, 고대에 '감'과 '검'이 같이 쓰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지만 부식해 없어질 때까지 신성성의 제 역할을 다 하는데는 변함이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검. 곰. 한이 같은 어의로 쓰이던 시대부터 금줄이 존재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형성시부터 금줄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감'의 어의인 검. 곰. 한이 민족 형성 당시에 많이 쓰이던 말들이고 보면 무리가 없는 추론일성 싶다. 다시 말해 불교문화도, 유교문화도 아닌 순수 우리의 문화인 것이다. 즉, 한민족의 뿌리에 깊게 서린 특이한 문화임이 틀림없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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