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범 진 (법성포 거주, 향리학회 회원)

- ① 독바우 -

조선 초, 김종서(金宗瑞)(1390~1453)와 정인지(鄭麟趾)(1396~14780)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편찬하여 문종 1년(1451)에 총 139권으로 완성된 ‘고려사’ 제79권 식화 2 조운조에 우리고장의 산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부용창(芙蓉倉)’이다.

▲제79권 식화 2 조운 조
‘國初南道水郡置十二倉....靈光曰芙蓉’

[건국초기에 남방각도의 수군(배로 운송이 가능한 하천 또는 바다를 끼고 있는 고을)에 12개의 창고를 설치하였는데 .....영광에는 부용창....을 두었다.]

‘부용창(芙蓉倉)’의 역사는 고려 성종 12년(992), 지금부터 10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고려 때 60포(浦)중의 하나였음을 감안하면 우리고장의 조운역사는 이 보다 훨씬 앞서의 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리학회에서는 그 실체를 살펴보기 위해 지난 6월 4일(금) 오후 3시부터 3시간 여 동안 ①독바우→②언목→③남선전기변전소→④괸돌→⑤대삿고개→⑥휘파람고개→⑦세운(稅運)골 잔등→⑧부용창지(芙蓉倉址)→⑨마천 순으로 옛길을 따라 답사하였다.

이제 이 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찾아가 보자 !

지금이야 ‘독바우’가 ‘법성포’의 관문이 되었지만, 100여 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독바우’는 ‘언목’과 ‘한사랑’을 오가는 나루터가 있었을 뿐 우리고장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해변 가였다.

조선시대 영광군 관방(關防)이었던 우리고장은 정조13년(1789)에 이르러 영광군수 관할에서 분리되어 100여 년 동안 독자적인 행정권역을 형성하게 된다. 즉, 독진(獨鎭)으로 승격되어 영광군수 관할의 29개(?) 방위면 중 ‘법성진(法聖鎭)’에 ‘진량면(陳良面)’이 할속(割屬)되어 영광군수보다 품계가 높은 종3품 첨사(僉事)가 1895년까지 106년 동안 ’영광군‘과 별개의 행정단위로 3정-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을 행사하였다.

현 법성포 독바위 사거리
이와 같은 연유로 조선 순조 때, 서영보(徐榮輔)(1759~1816) ․ 심상규(沈象奎)(1766~1838)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만기요람’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고장의 수세(收稅)고을이 영광 등 ‘12고을’이 아닌 ‘13고을’로 표기하였는데, 이들 수세지역에서 수납되는 세곡 등이 ‘석장리-동짓재‘ 루트를 이용했기 때문에 ’석장리‘가 오히려 ’법성포‘의 관문이었지 지금같이 ’독바우‘가 아니었다. 또한 1915년 7월에 제작된 측량원도에도 민가가 들어선 대지지번이 없는 모두 임야였고, 1910년, 조선총독부에서 측량원도를 제작하기 위하여 편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지(朝鮮地誌)’에도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독바우나루터’가 영광군 구수면 한시리(韓侍里)(한시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나루터로서의 역할도 미미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법성진 진지도’(1872년, 추정)에서 ‘독바우’의 주변현황을 살펴보면 현재 ‘법성포초등학교’ 앞과 ‘언목’은 갯가였고 ‘성제동’, ‘복룡동’ 마을 앞에는 제방을 쌓아 논농사를 하였다. 또한 육로(陸路)로 ‘법성진성’에서 ‘독바우’를 경유하여 ‘복룡동’에 이르는 거리가 7리(里)(약2.8km)였고, ‘언목’은 ‘독바우’와 ‘성제동’(추정)을 경유하여 5리(약2km)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렇듯 이 당시 ‘독바우’는 ‘법성진성’에서 해변 길을 따라 ‘언목’과 ‘복룡동’을 다니던 한 적한 갯가였다.

이러했던 ‘독바우’는 강화도조약(1876년)이래 일본사람들의 거주가 합법화 되고, 목포항에 이어 군항이 개항(1899년)되자 우리고장에도 을사늑약(1905)을 전후로 일본사람들이 하나, 둘, 터를 잡게 되며, 오사카 등지를 오가는 무역선이 입․출항하여 인접 다른 고을 보다 이른 시기에 개화의 물결이 급속히 밀려들었다.

1906년에는 조선시대 객사를 이용하여 소위 신식학교라는 ‘법성사립보통학교’(현 법성포초등학교 전신이 아님. 법성포초등학교 전신은 1908년에 개교한 사립 법성포보통학교임.)가 문을 열었고, 포구 앞에 제방을 쌓아 지금 파출소가 자리하고 있는 주변 일대에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들어서며, 숲쟁이 공중변소 앞에서 개교했던 일본인들의 소학교가 불이 나 현재 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 ‘소학교’를 새로 지어 1912년에 이전하였다. 1910년 3월 16일 법성포 중리 (이때는 행정구역이 통폐합되기 전이기 때문에 진내리의 주소가 ‘법성포 상리, 중리, 하리 등으로 우편주소를 표기했다.)에 우편소도 문을 열었고, 한의원에 대칭하여 양의원이라 불렀던 ’마지마병원‘도 문을 열었다. 더불어 ‘독바우’와 ‘언목’사이의 나룻 길을 막아 법성포↔영광↔송정리 사이를 오가는 신작로도 개설되었다.

▲법성포지도(1918년)

법성포지도(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하여 1918년에 발행한 우리고장의 지도를 살펴보면 ‘독바우’와 ‘언목’사이를 막아 제방도로가 생겼고 ‘완탄교’가 개통되어 영광길이 열려있다. 또한 법성포↔무장↔고창 길도 개통되어 있고, 이 당시만 해도 목냉기 제방을 막지 않아 바닷길이 열려 있다.

신작로가 개설되자 ‘광주↔송정리↔영광↔법성포 간 운송업이 허가되어(1920년 7월 27일), 매일 1회 정기화물자동차가 왕복하였고, 고창↔법성포 간 버스가 운행(1922년 10월 3일)되는 등, ‘독바우‘는 우리고장의 관문으로 급격히 변모되어 간다.

1930년대에 이르러 ‘독바우’는 김상호(고창거주)라는 사람이 이곳에 굴을 뚫어 금을 채굴하게 된다. 그리고 한 가구, 두 가구. 민가들이 자리를 잡았다고 ‘법성향지’는 전한다.

1970년대까지 젓갈 저장고로 활용되었던 이 굴이 지금도 주유소 뒤편에 남아 있는데 어떤 이들은 ‘이 굴이’ 독바우‘에서 ’동짓재‘까지 뚫려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친구는 ‘초등학교 때, 이 굴로 실제 들어가 ’동짓재‘로 나왔다.’는 무용담을 자랑하기도 했다. 필자도 초등학교 다닐 때 여러 친구들과 이 굴을 들어가 봤는데, 굴 초입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었으며, 음습하고 무서워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섬증이 들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뒤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이곳 ‘독바우’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일화도 전래되고 있다.

“복룡동 입구가 엎드린 용(伏龍)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영광’의 ‘창령조씨‘문중에서 이곳 ’복룡명당‘에 묘를 썼다고 한다. 헌데 지사의 이야기인 즉은 ’엎드린 용은 알을 보아야 발복하는 법이니 묘소에서 건너 보이는 이곳 ‘독바우’에 용알(龍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용이 상상의 동물인데 용알(龍卵)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창령조씨‘문중에서 이곳 ’독바우‘ 해안가에 용알형상을 한 바위, 즉, 인공용알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법성향지에서 전재)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