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여민동락 공동체 대표, 영광신문 편집위원

몇 해 전 일입니다. 노익장을 자랑하는 여걸 한 분이 계셨습니다. 젊은 시절 쌀가마 한두 섬 둘러메는 건 일도 아니었다는 말씀이 결코 허세로 보이지 않는 기골 장대한 어르신이었습니다.

쌍지팡이에 의탁하는 불편한 다리만 빼면, 호쾌한 목청에 걸쭉한 식성이 말해주듯 선천적으로 건강하신 분이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청상과수로 아들 하나 키우면서 억척스레 세상을 헤쳐오신 어르신에게 천명을 누리지 못하고 서둘러 어미 곁을 떠나버린 아들은 감당해낼 수 없는 큰 아픔이었습니다.

말로 다 풀어내지 못할 그 탄식들을 가슴에 묻고서, 타향에 홀로 남아 마을 문중의 제실 한 켠을 터전 삼아 노년을 보내시는 어르신은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반듯한 성격이셨지요. 귀 어둡고 사리판단 흐릿해진 다른 어르신들에 비하면, 복지센터 최다 출석에 정신까지 꼿꼿한 어르신은 언제나 친구처럼 다정하고 성격 호탕하고 편안한 분이어서 인기짱이었습니다.

복지관련 일을 하다보면 으레 더 누추한 자리, 더 허약한 분에게 손길이 많이 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르신같이 독립심이 강하고 마냥 화창함을 유지하시는 분을 대할 때면, 그 화창함 속에 서려 있는 고독과 투지를 미처 읽어내지 못할 때가 간혹 있답니다.

그래서였습니다. 마냥 밝으신 모습 안에 갇힌 그늘과 회한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밥 때가 조금 지나 인근 식당에서 가지고 온 나물 반찬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기왕이면 좀더 신선할 때 어르신들과 나누고 싶어, 다른 약속을 미루고 늦게까지 어르신들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이 사시는 그 제실에 도착해서 “어르신, 어르신…”하고 불렀을 때, 대답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다짜고짜 “어떤 놈이냐! 누구여?”라며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치시는 겁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가, 순간 기겁을 했답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높이 들고 앉은걸음으로 몸을 움직여 방 귀퉁이에서 무얼 찾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귀퉁이를 살피니 뭉툭한 망치가 있었습니다. 아뿔싸! 자칫했으면 나물 한 봉지 전하려다가 아닌 밤중에 큰 사단이 날 뻔 했지요.

그렇게 사시고 계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후 내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팡이와 망치 하나를 안방에 들여 놓고 사시는 어르신이셨습니다. 지팡이는 덮고 주무시는 이불 위에 놓고, 망치는 안방 문 옆 귀퉁이에 놓고 말입니다. 어르신에게 지팡이와 망치는 그저 단순한 지팡이이고 망치일 수 없었습니다.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의 고독과 서러움 그리고 호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내 서로 웃으며 상황을 마무리했지만,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아리고 시렸답니다. 전화기는 있어도 울리지 않고, 찾아오는 이 없으니 밤중에도 전기 켤 일 없이 TV 불빛으로만 세상을 보시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거들어야 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어김없이 올해도 어버이날이 다가옵니다.

구십을 바라보는 우리 어머니, 꼬박꼬박 시간 정해놓고 전화라도 자주 드릴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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