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여민동락 대표, 영광신문 편집위원

시골마을 면소재지에 그나마 하나 있던 구멍가게가 급기야 문을 닫았다. 한때는 양조장도 있었고 이발소도 있었는데, 이제는 몇 십 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던 점빵까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농사일 하다 급히 물건 필요할 땐 점빵 덕을 톡톡히 봤는데, 앞으로는 막걸리 한 병, 담배 한 갑조차 읍내까지 나가야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식구 중에 누군가는 ‘구매난민’이라고 표현했다.

언젠가 백수 앞바다로 백합을 캐러 간 적이 있다. 모처럼 공동체 아이들과 함께 가족 나들이도 하고 콧바람도 쐴 겸 여러 식구들이 함께 했다. 백합을 제법 잡아서 무침도 해먹고, 죽도 끓여 먹고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경로당 어르신들을 찾아뵈었을 때 백합 얘기를 늘어놨더니, 몇몇 어르신들이 조용히 탄식하신다.

“그렁께 말이여. 몸 성했을 때는 백합도 잡고 맛조개도 잡고 그랬는디…. 인자는 젓갈 장시도 동네에 안 댕긴께 구경헐 일이 없당께. 딴 것은 몰라도 어디 유제(이웃)에 그런 것까정 부탁할라믄 미안헌께, 밭에 나는 것이나 그냥저냥 묵고 말제.”

아차 싶었다. 이문이 남지 않는 탓에 젓갈 장수도 시골마을을 외면하고, 거동이 불편하고 버스 타기도 시원치 않아서 장에 나가는 일도 드문드문하니, 백합이니 맛조개니 다 젊은 날 한때의 일이 돼가고 있었다. 과일 하나 생선 하나 제철 음식을 드시고 싶어도 포기하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이문이 남지 않는 마을가게 ‘동락점빵’이다. 왜 아름답고 소박한 것들은 모두 이문이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 사라지고 마는지…. 차라리 ‘이문이 남지 않는 점빵’을 차리고 싶어졌다. 이문이 남지 않기 때문에 오래 갈 수 있는 그런 점빵 말이다.

여민동락 복지센터 안에 4평짜리 점빵을 짓고, 막걸리도 갖다 놓고 담배도 팔고 생필품도 놔뒀다. 물론 아이들 군것질할 아이스크림과 과자도 있고, 간단한 안주거리도 있다. 점빵이 좀 더 영글면 아예 어르신 몇 분을 동네 ‘마담’으로 채용할 생각이다. 외상을 하든 돈 대신 고춧가루나 참기름을 내든 치부책 하나 놔두고 동네 사랑방으로 가꿔갈 계획이다.

마을 사람들 호응만 좋으면 묵은지에 두부 한모 내놓고 막걸리도 한잔 가볍게 하실 수 있도록 소박한 선술집도 마련하고 말이다. 아예 마을을 지나는 도시 손님들을 상대로 어르신들이 생산한 먹을거리도 팔고, 혹여 나중에 도시 손님들이 모태지면 여기저기 다른 지역에서 소문나기 시작한 농도직거래사업인 채소꾸러미 사업까지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뿐인가. 자연마을 42개를 날마다 돌아다닐 중고 탑차도 하나 장만했다. 이른바 이동식 마을장터다. 스피커 빵빵하게 음악을 틀고 “왔어요 왔어~ 젓갈장시가 왔어요. 두부장시가 왔어요. 달걀장시가 왔어요~” 할 참이다.

단순히 물건만 파는 장터가 아니라, 은행에 가서 자식들이 보내온 용돈도 찾아다 드리고, 허리 아픈 데 부칠 파스도 사다 드리고, 몇날 며칠 전깃불 나가 텔레비전 불빛에만 의존하며 사는 집에는 형광등도 사다 갈아드리고…. 젊어서 친하게 지내던 옆 마을 친구에게 콩 한 되, 깨 한 봉지 전하는 심부름센터 역할, 택배 노릇도 하고 말이다. 또 장터가 열리는 날엔 경로당에 가서 건강 체크도 하고 다른 마을 소식도 전하고, 어르신들이 십시일반 돈 천 원씩만 내면 푼돈 모아 제철음식 같이 사서 나눠먹게 도와드리고…. 정말이지 신명나는 마을 이동장터를 열어서 한판 굿을 하는 것이다.

이문은 남지 않아도, 마을을 키우고 사람과 사랑을 엮는 일이야말로 큰 이문이 남는 장사일 것이다. 이문이 남지 않아야 존재할 수 있고, 존재 자체로 마을을 이롭게 하는 일. 그 단순한 기쁨을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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