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여민동락 공동체 대표 살림꾼

단체자치와 주민자치의 결합 혹은 융합을 지방자치라고 한다. 말 그대로 교과서의 가르침이 그렇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사회 지방자치는 실패해 왔다. 한국의 자치는 국가통치의 제도적 변형 수준에 불과했다. 제도로써 보장은 해왔지만 주민의 생활공간인 살림의 무대까지는 전이되지 않은 미완의 자치, 그것이 솔직한 모습이다. 주민 개개인의 살림과 연결이 될 때 자치는 완성된다.

그래서 자치란 스스로 다스린다는 형식을 넘어 스스로 이룬다는 내용을 담아야 의미가 제대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룬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본래 오래 전부터 스스로의 삶을 서로 기대어 성장하며 마을의 규약대로 잘 살아왔다. 하지만 본래 자치로 키워왔던 공동체의 자연력을 국가주도 성장 과정에서 모두 파괴 배제해 왔다. 그래서다. 복원이 필요하다. ‘스스로 이룬다는 자치란,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본래의 것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요새 마을의 귀환회자되는 이유도 그래서다. 국가에서 마을로, 개인에서 공동체로, 돈에서 관계로, 계몽에서 경청으로, 규제에서 자유로, 형식에서 본질로 옮겨가야, 말 그대로의 자치가 가능하다. 자치를 한답시고 주민자치위원회도 만들고, 기초단위의 의회까지 뒀지만, 그 안에 주민은 없다.

여전히 행정의 하위체계이든지 고작해야 형식적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 극단적으로 행정의 동원대상이거나 철만 되면 선거기계가 되고 마는 형국인 셈이다. 그렇다고 국가차원의 지방자치의 성과와 긍정성을 전면 부인하는 건 아니다. 지방자치 무망론을 주장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자치를 자치답게 완성해가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필자가 관장으로 있는 광산구 노인복지관에는 더불어자치회가 있다. 복지관 회원 어르신 이십 여 분이 위원으로 활동하신다. 단순히 조직 도표상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자문기구가 아니다. 복지관의 모든 운영을 자치회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실상 복지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관장을 포함하여 사회복지사들은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주변의 많은 분들이 우려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복지대상자로 처우하고 심지어 서비스를 받는 수혜자로만 취급했던 과거와 달리, 주인으로 예우하고 권한과 책임을 위임한 성과다. 자치회는 날이 갈수록 진화했다. 대상자에서 주체로, 서비스 수혜자에서 마을의 원로로 스스로의 품격과 존엄함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권위주의 통치시절에 익숙한 어르신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치회가 나서서 복지관 회원들의 뜻을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면서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느리고 불편하지만, 공인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다수에게 공감 받는 결론을 도출하는데 특별한 장점을 갖고 있다. 자치회가 스스로 이뤄가는 모범은 활동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예산없는 행사는 생각지도 못했던 관행에서, 필요한 일이 생기면 십시일반 추렴하고 능력만큼 거들면서 울력도 하고 품앗이도 해가며 마을을 일궈가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다.

마치 예전의 자연마을의 풍습처럼 말이다. “옛날에는 어디 면사무소에서 돈 주면 하고, 안 주면 안 했간디? 마을잔치야 다 마을사람들이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추렴해서 했제.” 하시며 복지관 대동제도 열고, 급기야 복지관조차 이용할 수 없는 어르신들을 돕기도 한다. 한 해 공부를 뽐내는 복지관 예술제나 개관기념 잔치도 우리끼리 하는 잔치고, 복지관 생일 기념식인디 우리끼리 보태야제 맞제.” 하신다.

그래서다. 변방의 작은 복지관이지만, 회원이 5,000명이나 되는 엄연한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일어나는 자치의 위력은 내년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실리게 될 만큼 전국적 귀감이 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표창은 물론이고, 한겨레 사회정책연구소 최우수사례로 선정되는 영광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치는 자치답게 해야 한다. 특히 과거식 정치로 자치를 훼손하거나 핵발전소 돈 몇 푼으로 마을의 자치력을 마비시켜서는 안 된다. 정치가 주민을 선거의 볼모로만 업신여기거나, 핵발전소가 골목마다 돈을 뿌려 주민들을 자립없는 걸인으로 취급하면, 정녕 마을은 망한다. 정치의 본령은 마을마다 본래 있었던 마을의 자치역량과 마을리더들을 존대하고, 늘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면서 민주적 소통과 참여로 스스로 이뤄갈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잘 거드는 일이다. 마치 밤하늘의 별빛을 빛나게 하는 은은한 어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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