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항선생 학술세미나가 인문학적 관점의 정유재란 포로 수은 강항에 대한주제의 내용으로 무라까미 쓰네오 수은강항선생 일본연구회장의 나의 수은 강항선생 연구의 발자취와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의 수은 강항선생과 영광군 발전방안’, 김덕진 광주교대 사회학교수의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수은 강항의 역할과 위상등의 발표가 열렸다. 영광신문은 강원구 회장의 주제발표 전문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수은 강항선생과 영광군 발전방안<>

강원구 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2. 간양이란?

<지난호에 이어>간양이란 말이 생기게 된 것은 중국 한()나라 한무제(漢武帝)시대 소무(蘇武), 이릉(李陵), 사마천(司馬遷)과 관련이 있다. 소무는 포로 교환의 임무를 맡아 흉노(匈奴)땅에 들어갔다가 체포되는 변을 겪는다.

흉노왕 선우(單于)는 소무가 굴복을 거부하자 북해(바이칼호)로 추방당하여 양을 키우면서 힘든 날을 보냈지만 자신의 절의를 지키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릉은 흉노 토벌의 장수가 되어 5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훙노 5만 병사들을 대적하여 용감하게 잘 싸웠으나 참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이릉의 일가를 몰살시키자,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와 슬픔으로 절망하는데, 흉노왕이 후하게 대접하자 마음을 돌려 흉노 땅에서 적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릉이 소무를 찾아가 선우가 나를 보내 그대를 설득하여 데리고 오라 하였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은데, 이제 그만 고생하고 함께 가도록 하세라고 설득하였지만 거절하였다.

소제(昭帝)가 즉위하여 흉노에 특사를 파견하여, 19년 만에 풀려나 한나라로 돌아가게 되고, 이릉과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서로가 시를 지어 교신한 사연들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문학인에게는 좋은 글쓰기 소재로도 활용되며, 지금도 소무목양(蘇武牧羊)이란 노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마천은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史記의 저자이다. 그는 역사를 기술하는 기전체(紀傳體)라는 획기적인 서술 방법을 창조했는데, 중국 역사가들은 정사(正史)를 기록할 때 사마천의 서술 방법을 많이 따랐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고대 문헌들을 접했으며,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사회 분위기, 지리, 풍토 등 다양한 문화를 체험, 과거 사건들을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하였다.

부친 사마담이 거의 30년간을 사관으로 재직했던 그는 생전에 자신이 이루지 못하고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의 과업을 완성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눈을 감았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史記 집필의 사전 작업에 착수하고, BC 103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고향 친구인 이릉을 비호하다 큰 변을 당하게 된다.

한무제에게 이릉은 흉노족 토벌에서 패전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5천의 군사로 5만의 적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며, 화살과 군량미가 제때 공급되지 않았음에도 분투했습니다.”

그는 파면은 물론 감옥에 갇혔으며, 사형까지 언도받았다. 사기의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당시 한나라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자들은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과 생식기를 잘라내는 궁형(宮刑)으로 살아남는 것이었다.

궁형은 육체와 정신 모두를 크게 훼손시켰으며, 자신이 선택하면서까지 살아남아야 했는지를 깨닫고 고통 속에서 사기를 집필하여 중국 역사상 최고의 역사서로 남고 있다.

3. 주자학

주자학은 주자선생의 학문을 말하며, 주자(朱子: 1130- 1200)는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존칭으로, 송대의 유학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학설은 공경을 기본으로 삼아 그 근본을 확립하고,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경지에 이른 후, 자신의 입장에 대입하여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개념을 중심으로, (), (), ()시대 유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의 사상과 저술, 교육론은 조정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다음으로 숭배되었고, 풍부한 독서와 세밀한 분석을 중시하는 그의 학풍은 후세 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월남(越南) 등의 주변 국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의 고향은 신안(新安)이며, 아버지 주송(朱松)의 부임지였던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희()이며,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등이 있다.

주문공(朱文公)자양선생(紫阳先生)고정선생(考亭先生)창주병수(沧州病叟)운곡노인(雲谷老人)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1130915일에 태어나 1200423일에 사망하였다. 당시 대과 급제자들의 연령은 평균 서른다섯 살이었는데, 그는 열여덟 살에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공자, 맹자로 이어 내려오는 유학을 주돈이(周敦頣), 정호(程顥), 정이(程頣), 장재(張載) 등의 사상적 스승으로 이어받게 되었는데, 여조겸(呂祖謙)과 교류하면서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했다.

금나라가 침입하여 조정이 주전파(主戰派)의 입장을 밝혔으며, 가열되는 파당 정치에 염증을 느껴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과 강학에 전념했다. 여조겸의 주선으로 육구연(陸九淵)을 만나 학문을 통해 치열한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178년 그는 남강군(南康軍)의 지주에 임명되었는 데, 그곳에 백록동(白鹿洞)서원을 다시 세워 명사들을 초빙하여 강학을 실시했다. 영종이 즉위한 후 주자는 시강(侍講)으로 발탁되어 大學을 강술했지만, 한탁주(韓侂胄)를 비판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렸다가 한탁주의 눈에서 벗어나 파직되었다.

1200년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1세의 나이로 고정(考亭)에서 4월에 생을 마감하고, 장례는 11, 전국에서 학자와 학생 1,000여명이 몰려 거대한 장레식을 거행했다. 그가 사망한 뒤 문()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227년 태사(太師)로 증정된 후 휘국공(徽國公)에 봉해졌다.

4. 주자학이 한국에 미친 영향

한국에 주자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1224년 주자의 증손 주잠(朱潛)에 의해 처음 들어왔으며, 고려 말 충렬왕을 호종하여 나라에 갔던 안향(安珦)1289년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색,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인후, 기대승, 조식, 성혼, 강항 등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퇴계(退溪)선생과 율곡(栗谷)선생에 의해 주자학은 더욱 발전되었고, 조선 초기부터 한국인의 마음 속 깊이 주자사상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주자선생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퇴계선생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율곡선생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짓기도 하였고, 주자선생의 권학시(勸學詩),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 사가지본(四家之本) 등은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진 것이다.

주자학이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의 철학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혀간 강항선생이 등원성와(藤原惺窩)에 전수되고, 덕천막부(德川幕府)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일본에서도 공식적인 지지를 얻었다.

우리나라 보물 제1671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윤순거(尹舜擧)선생이 초서체로 쓴 주자선생의 무이구곡가 병풍이 있다.

5. 윤순거

윤순거(1596~ 1668)는 강항선생의 제자이며, 조선의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파평,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당대의 명유인 성혼(成渾: 강항선생의 스승)의 딸이다.

1633년 사마시에 합격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가 귀양 가고, 숙부 윤전(尹烇)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형조좌랑, 안음현감, 의령현감 등을 지냈다. 의령현감으로 재직시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당을 건립하였다. 1655년 종부시주부·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갔다.

1660년 영월군수가 되어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하고,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였고, 1665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오르지 않았다.

강항선생을 위해 강감회요서(綱鑑會要序수은강공행장(睡隱姜公行狀)을 저술하고, 강항선생이 포로생활 중에 견문한 것을 기록한 책인 간양록 등을 편찬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해 노릉지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사회질서인 군신관계를 전제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저서로는 동토집·노릉지가 있으며, 무이국곡가 보물 제1671호의 글씨가 전한다.

6. 등원성와(후지하라 세이카)

강항선생은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이예주(伊豫州: 이요주), 지금의 사국(四國: 시고쿠) 애원현(愛媛縣: 에히메현)의 장빈(長濱: 나가하마)로 끌려갔다가 대주성(大洲城: 오즈성) 밑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비록 고관대작은 아니었지만, 조선 조정의 관원이었고, 또 주자학에 통달한 기개 있는 선비인지라 그는 일본 땅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게 되지만, 실패만을 거듭하다가 2년 뒤인 1598년에는 경도(京都)의 복견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 강항선생의 문하로 입문을 청한 사람이 묘수원(妙壽院)의 순수좌(舜首座)라는 승려였다. 이 순수좌라는 승려가 후일 일본 주자학의 개조(開祖)가 된 등원성와이다.

등원성와는 조선 주자학에 빠져들면서 승복을 벗어던지고 유학자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몸소 조선 도포를 만들어 입고 서책을 대하는 것으로 조선 주자학의 진수를 온몸으로 터득하고자 하였다.

평소에도 유건(儒巾)을 쓰고 있을 만큼 명실상부한 조선 주자학의 신봉자로 자처하더니 마침내 강항 선생이 친필로 써 준 사서오경에 알본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훈()을 달아서 일본 주자학을 싹트게 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유학이 정립되는 결과를 거두게 된다.

강항선생은 지필묵(紙筆墨)은 고사하고 알몸으로 일본 땅에 잡혀간 그가 친필로 사서오경(四書五經) 아홉 책의 방대한 내용을 틀리지 않고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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