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4대 성지라기 보다 5대 성지 주장… 수은 강항선생의 왜국의 유교전파로

전남대학교 문화재협동과정 석, 박사과정(인솔 김용의 교수) 12명은 지난 11일 내산서원과 영광군지역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찾아 탐사(探査)했다.

이들 일행은 오전 9시 조선시대 성군(聖君) 세종대왕과 동서지간인 완역재(玩易齋) 강석덕(대민공1) 이하 4대인물(강귀손, 강학손, 강희맹, 강희안)이 배향된 이흥서원을 찾아 강도원 별유사로부터 유서(由緖) 깊은 이흥서원에 대한 안내를 들었고 이어 지근거리에 있는 내산서원에 들러 강재원 영광내산서원보존회장으로부터 수은강항선생의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며 선비정신의 표상(表象)인 강항이 조선선비로 왜국에 포로가 되어 극적으로 유교를 전파한 기막힌 역사를 접했다.

이어 천년고찰 불갑사를 찾아 전문 안내인의 소개로 불갑사만이 갖고 있으며 타 사찰과의 색다른 특이점(特異點) 등 범인(凡人)으로 미처 알지 못하고 불갑사만이 품고 있는 숨겨진 속살까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웅장하면서도 위압감을 주는 사천왕상상은 원래 고창 연기사에 모셔져 있었지만 진흥왕 1(540)부터 35(574)까지 연기조사 만든 것으로, 조선 고종 7(1870)에 설두대사가 나무배 4척을 동원하여 현재의 사찰인 불갑사로 옮겨왔다는 설명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어 수은강항의 천재성이 덧보이는 맹자(孟子)정비를 보자마자 원래 맹자정비가 있었던 곳조차 더 둘러볼 시간도 없이 차에 올라 3km 떨어진 곳 논잠포(구명 서포)에 다다른다.

선생이 끌려간 논잠포는 그 옛날 조기잡이 배로 넘실거렸음에도 영광군 문화관광 차원의 안내판마저 없이 수은강항선생 섭란사적비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일행들은 눈으로 확인하고도 오랜 간척사업으로 믿기지 않은 역사를 뒤로 한 체 다시 한 번 마음으로만 그 당시를 그리며 잠시 회상(回想)에 젖기도 했다.

내가 이 땅에 불심(佛心)을 심었노라

오후 일정은 흡사 준마(駿馬)가 전쟁터에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듯 바삐 내달렸다.

그렇지만 놓칠 수 없는 이 지역 인물의 세계화가 마침내 5대 종교로 승화된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朴重彬) 거사(居士)를 놓칠 수가 없었다. 만고일월(萬古一月)과 대각터, 대각을 품은 옥녀(玉女), ‘무지개를 쫒는 소년이라는 동화(童話)책도 생생하고, 이 지역 위대한 인물로 대()를 이은 엄연한 팩트 등등...

이처럼 갖은 역사를 품은 지나치기가 너무도 아쉬운 구수 산을 뒤로만 두고 승합차는 전국 팔경(八景)에 버금가는 백수해안도로를 접어든다.

썰물이어도 좋아라!!’고 말하는 탄성(歎聲)과 함께 저기 멀리 손에 잡힐 듯 마라난타혜존비가 내가 이 땅에 불심(佛心)을 심었노라고 최초를 내세우며 반기며 손짓해 왔다.

끔찍한 정유재란의 참화(慘禍)!! 1597년 정유재란 당시로 되돌아가는 곳을 금 새 스치고 지나간다. 이곳은 동래, 진주정씨 가문 열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정유재란 때 사대부(士大夫) 부인(夫人)들이 왜군(倭軍)으로부터 수모를 면하기 위해 막다른 바다를 바라보고 절망감(絶望感)으로 서해바다에 투신 순절 했던 곳이다.

그 부인(夫人)들의 순결만큼이나 반어법(反語法)적 표현을 굳이 빌자면 주변의 경관(景觀)과 서해낙조(落照)는 매우 빼어나고 아름답다. 하염없이 슬픔을 가눌 수 없음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 자꾸만 펼쳐지는 해안선은 미세먼지가 쌓이고 쌓여 농무(濃霧)로 내려 앉아 나름 장관(壯觀)을 이루고 보이지 않는 일곱 개의 섬, 칠산 섬은 칠산 바다의 영화 마파도도 감추듯 숨죽여 수줍게 가리고 만다.

도참(圖讖)설이 존재하는 영광군 백수의 지명

대한민국 팔도(八道)가 영광지역에 다 펼쳐 놓은 듯 영광읍에서 백수읍(()자에 봉우리 수()자를 쓰는 영광 백수의 지명은 해발 351m 구수산에서 유래됐다.

구수산 봉우리 수는 일백()에서 하나가 모자란 아흔 아홉 개로 부족한 부분이 아쉬워 일백 백자 대신 흰 백자를 사용한 이 같은 지명이 유래 됐다고 전함)으로 들어 오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지명 하나가 먼저 손짓하며 반긴다.

지명(地名)이 범상치 않은 논산리이다, 이어서 중앙교를 거쳐 대전리와 그 너머 4~5km에 드디어 수도(首都) 한성(漢城)리가 손짓하며 우리 일행을 반기며 다가 왔다.

그러는 사이 또 다시 지근거리에 왠지 숙연해 지는 곳이 있다. 우리네 삶이 뭣이던가?! 나 아닌 그 시대의 그의 입장에서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느껴 보려고 잠시라도 노력을 해봤는가?? 어쩌면 그게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하는 참이고 진실 됨이 아니겠는가??

그런 상념(想念)에 잠길 무렵 바로 그곳이 성큼 다가왔다!! 영광군 염산면 설도항. 당시 염산교회 교인 77명 기독교인들이 돌멩이에 묶여 무참하게 수장된 한국전쟁의 비극의 장소이다.

지금은 명암(明暗)이 갈려 어두운 역사터에 설도 젓갈 타운과 수산물 회센터, 각종 회집 등으로 넘쳐나고 매주 토요일이면 온갖 공연(公演)으로 넘치고 풍요로움이 가득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 이미 시간에 쫒겨 영광읍에서 못 보고 왔지만 193710월경에 설립된 신유박해와 병인년 박해로 6명의 순교자가 있는 영광성당도 존재하고 있다.

유교(儒敎)를 왜()에 전파한 지성(至聖) 수은 강항

그런 연유(緣由)로 영광을 4대 종교(宗敎) 성지(聖地)라고 말하나 어쩌면 수은 강항의 왜국에 유교(儒敎)의 전파(傳播)로 인해 일본 유교의 비조(鼻祖)가 된 까닭으로 유학(儒學)과 유복(儒服)인 심의(深衣)를 왜국에 전파한 지성(至聖)인으로서 어쩌면 5대 성지(聖地)로 더 깊게 연구해 보고 싶다.

이제 왼쪽으로 가면 광주로 직행해 수 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도 일행 중 한사람의 우직함이 작용해 가는 게 어쩜 미련(?)스럽기 까지 하다. 결국 영광군의 랜드마크 칠산 타워와 칠산 대교로 차가 움직여간다.

아스팔트임에도 때론 차가 덜컹거리며 가속도가 붙으며 차내 불만을 대신한다. 거의 수면부족과 피곤함으로 참여한 일행들은 오수(午睡)에 졸고 3시가 넘어서야 드디어 광주가 보인다.

마침내 인솔한 김용의 교수는 종()을 말하며 오늘 역사탐방의 소중함을 거듭 강조하면서 의미 있는 하루임을 되새김해 크고 작은 소란과 불만을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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