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호/ 시인, 행정학박사, 백두산문인협회 회장

21세기 현대는 초고속정보화사회다. 지난 세기의 10년 변화 보다 금세기 1년의 변화가 훨씬 크다. 갈수록 흘러가는 세월의 속도는 빠르기만 하다. 현기증나는 변혁과 격랑(激浪)의 세월 속에서 우리는 20194월을 살고 있다.

나는 해마다 4월이 되면 내가 시인이어서 그런지, 영국의 시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의 시 황무지(荒無地, The Waste Land)를 생각한다. 국가와 사람들이 편을 짜서 무자비하게 서로 죽이고 죽이며 적대와 살기(殺氣)로 맞섰던 제1차 세계대전을 치루고 난 후의 유럽의 신앙적 허무와 정신적 황폐를 묘사한 걸작이다. 페허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희망과 구원을 노래한 작품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차라리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메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목숨을 길러주었다(’황무지의 일부).

이승만 장기 독재와 부정 선거를 조직적으로 자행한 국가권력이라는 거대 악()에 맞서 싸웠던 4·19민주혁명 59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면서 묘지과 영안 봉안소를 둘러보았다. 해마다 참석하는 기념식이지만 해마다 감회가 다른 것은 나만의 감상일 것인가.

5월은 근로자의 날(1), 어린이날(5), 어버이날(8), 부처님 오신 날(12), 스승의 날(15), 5·18민주화운동 기념일(18), 성년의 날(20), 부부의 날(21), 방재(防災)의 날(25), 바다의 날(31) 등 감사와 사랑과 생명의 달이다. 이 날 중에서 자기와 연관된 날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세상사가 그러하듯이, 자기의 입장과 관계에 따라서 더욱 관심과 감회가 큰 날이 있다.

나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오면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가 고등학교 친구이기 때문이다. 광주살레시오고등학교 3학년 3반 친구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2, 윤 열사와 1979년 전남대 학생으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박기순씨의 영혼 결혼식 때, 처음 불려졌던 노래다. 소설가 황석영씨가 재야운동가 백기완선생의 묏비나리를 개작하여 가사를 짓고, 전남대에 재학 중이던 김종률씨가 작곡했다.

그 친구는 넓고 하얀 얼굴에 호수처럼 맑고 순한 눈빛을 가졌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에서 사법시험 공부한다고 있을 때, 당시 광주고등학교 앞 부근 계림동 헌 책방 앞에서 털털거리는 짐발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그를 우연히 만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 년 만에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길거리에 서서 무엇하며 지내느냐고 서로 물었다. 군대 갔다 와서 은행에 있다가 나와서 지금은 광천동에서 신용협동조합 운동과 들불야학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웃었다. 서로 바빠서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하며 헤어졌는데, 그것이 그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는 전남대 정외과를 나와서 영어 회화도 잘 했는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시민군 대변인으로 외신기자 회견도 했고, 당시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 등이 모두 후배들이어서 투쟁본부 시민군의 사실상의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527, 전남 도청 마지막 사수(死守)의 밤에 도청에서 결사 항전하다가 중무장한 공수특전부대 계엄군에게 장렬하게 죽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순하고 맑은 눈과 얼굴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정의감이 그토록 강하고 용감할 수 있었는지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다. 더구나 우리가 다닌 고등학교는 매일 아침 조회시간과 수업이 끝난 오후 종례 시간에 일어서서 십자가 성호(聖號)를 그으며 주기도문을 외우는 천주교 미션 스쿨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이미 정치적·법적·역사적인 판단이 끝난 일이다. 39년이 지난 지금도 5·18민주화운동은 북한군이 주동한 폭동이라느니, 유공자들은 세금을 축내는 괴물집단이라는 등 망언(妄言)을 일삼는 극우 세력이 있다. 참으로 말문이 막힌다.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인가. ‘내가 이런 소릴 들을려고 인간이 되었나하는 자괴감이 든다.

4·19민주혁명은 독재와 부정에 맞서 젊은 대학생들이 피를 바친 투쟁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은 5·16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시민들이 피를 바친 항쟁이다. 민주와 자유, 정의를 향한 우리 국민들의 저항과 진보는 위대했다. 국민소득 3만불이 넘고 인구 5천만명이 넘는 ‘30-50클럽7번째 가입국이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은 모두 식민지를 지배했던 제국주의 국가였고, 우리나라만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가다.

우리 대한민국은 위대하다. 우리 국민들은 위대하다. 민주주의, 경제력, 교육력, 군사력 등 총체적 국력에서 세계 11위다. 대륙을 잃고 반도로 들어와서 남북으로 나누어 전쟁을 하고 7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 유일의 두 동강난 분단국가다. 그것도 모자라서 동쪽이다 서쪽이다, 좌파다 우파다 하면서 분열하고 대립하고 있다. 화합과 통합은 영원한 미완(未完)의 숙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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