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의/ 강항선생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일본인들 성씨(姓氏)는 산이나 뽕밭, , 강가, 바다, 숲속 등 장소도 참 다양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족도 지구상에 그리 흔치 않다. 일본인들을 경제동물이라고 폄하하는 데에는 이렇듯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

凌辱(능욕)적이고 치욕적인 衣服(의복)을 기모노라는 이름으로 개량하여 세계에 홍보하듯 널리 알리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중략>

이런 배경으로 인해서 일본이 인구가 1억 명이 넘고 이 人的(인적) 자원이 이러한 일본 여성들의 헌신적인 희생의 대가로 경제 성장의 주춧돌이 된 것은 그 누구도 否認(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 서양문물에 의한 군국주의 탄생

메이지 유신시대 일본의 지배층은 국가체제를 어떻게 가져가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했다. 서양화는 기본인데 서양의 많은 나라들 중 일본이 따라 가야 할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은 독일제국을 모델로 삼았다. 카이저가 있고 비스마르크라는 재상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끌어 가던 독일제국이 적합해 보였다. 군대는 해군은 영국해군, 육군은 프랑스군이 모델이었다.

이후 일본의 산업은 철저하게 정치계와 경제계가 결합한 즉, 정경유착형태로 발전했고 일본의 식민지는 부국강병의 근본 조건이었기에 식민지 확보전쟁에 육군과 해군을 육성해 갔다. 일본제국 육군과 해군은 청나라와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을 식민지화한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추구했던 서양화의 결과물이자 이제 서양화가 되었다는 신호탄으로 생각되었다.

유럽 최강대국인 러시아제국을 전쟁으로 격파를 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계기였다면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세계화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보유한 포탄의 전부를 사용했으며 막대한 돈을 전쟁에 투입해 경제가 파산할 지경에 처했지만 전쟁은 승리했고 조선이라는 식민지까지 얻었으니 손실 대비 성과가 좋았던 전쟁이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권력이 사무라이에서 디른 사무라이에게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곧 군사대국화와 같은 의미로 이해가 가능하다. 막부는 붕괴하고 다이묘체제는 붕괴했다.

지방분권의 시대에서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계급제도도 붕괴했다. 세습제의 사무라이 계급제도는 징병제로 대체가 되었다.

이제 중앙정부의 판단에 따라서 과거 보다 더 많은 병력을 단기간에 징병해 전쟁에 나설 수가 있게 되었다. 사무라이들은 이제 일본도를 들고 사무라이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총과 대포를 들고 다른 나라와 싸우는 것이다.

근대 일본을 디자인한 유교를 바탕으로 한 메이지 유신은 곧 일본의 침략전쟁 야욕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한편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이 1600년에 귀국한 후에도 유교에 심취했고, 4천왕이라 불리는 수제자들, 즉 하야시 라잔과 마츠나가 세키고 · 호리 교안 · 나와 가츠쇼를 키웠다.

그의 제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는 하야시 라잔(15831657)이다. 라잔은 1605년에 세이카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슨푸성의 서고관리 담당자로 임명되었고, 히데타다(1605), 이에미쓰(1624), 이에츠나(1655)의 에도 막부에서 4대째 대학두(大學頭)로 일하여 사상계의 쇼군이라 불렸다.(대학두는 에도 막부의 관학 학문소의 최고 책임자, 우리나라로 치면 대제학과 대사성을 겸임한 벼슬에 해당한다.)

에도 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무()와 불()의 나라였다. 그런데 에도시대는 무()의 사무라이가 유문(儒文)을 읽었다. 즉 문()을 통하여 사무라이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어 에도 시대 270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의 사무라이를 확립시킨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사상적으로 뒷받침 한 이는 일본 근세 유학의 비조(鼻祖)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후지와라 세이카 뒤에는 조선 선비 강항이 있었다. 160042일에 강항 일가와 선비들 38명은 후시미성을 떠나 귀국길에 올라 대마도를 거쳐 519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자 선조는 강항을 불렀다. 적중 사정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69일에 강항은 선조를 뵙고 왜국 사정을 알렸다.(160069일자 선조실록 참조) 이후 강항은 서울에 머물면서 승정원과 예조, 비변사 등의 자문에 응했고, 81일에는 선조로부터 술과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9월 초에 강항은 고향인 영광군 유봉마을에 돌아왔다.

그렇게 수십일(음력 42일 일본 후시미서 출발, 519일 부산도착, 9월 초 고향 영광도착)이 지난 후에야 72세의 부친 강극검에게 큰 절을 올릴 수 있었다.

 

# 왜국에 유교 전파한 강항의 국내외 제자들과 조선중기의 학파

1) 강항의 제자들

왜의 승려 후지하라 세이카와 만남

강항(姜沆)이 왜국의 수도 동경(東京)으로 온 이후 왜국의 지식인들과 접촉이 많아졌다. 의사(醫師)인 의안(意安), 이안(理安) 같은 사람은 강항이 있는 곳까지 찾아와 주었고 그들에 의해 묘수원승순수좌(妙壽院僧舜首座; 후지하라세이카(藤原惺窩)를 알게 되었다.

그는 본래 궁성 시종관의 이름난 집안의 자손으로 단마수 적송광통(但馬守赤松廣通)의 스승이었다. 후지하라는 두뇌가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익히 다룰 줄 아는 사람으로 어느 책이나 모르는 것이 없고 성품은 아주 꿋꿋해서 저희들 측에서는 그리 달갑게 여김을 못 받는 사람이다.

언젠가 도구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그의 인물이 뛰어난 것을 알고 서울에 집을 지어 연봉 2,000석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그는 집도 싫고 곡식도 싫다하고 약주소장승준(若州小將勝俊)과 적송광통(赤松廣通) 같은 장군들과 놀기를 좋아하였다.

적송광통과의 만남

여기에서 강항(姜沆)의 포로생활 중에 여러 가지로 큰 영향을 끼진 왜장 적송광통에 대해 몇 가지 알아 두고 넘어 가야 하겠다. 적송광통은 당시 왜국의 장수이자 武人(무인)이었다.

그는 일본의 환무천황(桓武天皇)9세손이었다. 육경(六經)을 좋아하는 그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말 위에서 까지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재주는 좀 미욱한 편이어서 해석이 없이는 한 줄도 내려 읽지 못했다 한다.

적송광통의 스승이었던 후지하라 세이카는 적송광통을 평하기를 일본 놈의 장수, 장관들이란 모두가 도둑놈들이요, 적송광통만은 사람 마음을 지녔다고 말하고 일본에는 상례(喪禮)라는 것이 없으나 적송광통만은 3년 상을 치뤘고 언제나 중국제도와 조선의 예법(禮法)을 착실히 좋아 하였다고 말했다.

의복과 음식 같은 하찮은 일까지라도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을 본뜨려하니, 그는 일본에 산다 하더라도 일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강항은 가끔 적송광통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적송광통은 언제나 선생을 만나면,“안녕하신가요?”하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청정(淸正)이나 좌도수(佐渡守) 같은 자들과 틈이 난 사이가 되어서 행여 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여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또 그는 우리나라 선비로 포로 신세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 형제들에게 육경(六經)의 큰 글씨를 베껴 주도록 부탁하고, 그 값으로 온전을 돌려주었다.

강항(姜沆)은 그 뒤 귀국길에 이 은전으로 배편을 구하는데 용이하게 쓰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적송광통은 우리나라의 오례의서(五禮儀書), 군학석채의목(郡學釋寀儀目)을 얻어 보고 단마(但馬)의 사읍(私邑)에다 공자묘(孔子廟)를 세웠고 또 우리나라의 제복(祭虙)을 본떠 입고 틈틈이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제의(祭儀) 익히기를 일삼았다.

그 후 적송광통은 강항(姜沆)이 귀국하던 해에 관원(關原)의 전쟁에 서군(西軍)으로 참여한 후 죽전성(竹田城)에서 근신하고 있었는데 도구가와는 구정자거(龜井玆耟)에게 인번(因幡)의 궁성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그때 구정자서는 적송광통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드디어 성을 함락시켰는데 그 성을 함락시킬 때 불을 질러 무찔렸다는 이유로 도구가와는 그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안 구정자거는 그 짓은 적송광통이 한 것이라고 거짓보고를 하자 도구가와는 적송광통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다. 적송광통이 자결했을 때의 나이는 39세였고 경자년(1600)에 해당된다.

이떄 적송광통의 스승인 후지와라세이카는 그를 슬퍼하면서 30수의 조가(弔歌)를 지어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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