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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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戰國)시대의 충신, 굴원

굴원(屈原)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중국 호북성(湖北省) 자귀현(秭歸縣)에서 태어난 그는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부름을 받고 좌도(左徒, 지금의 부수상 격))라는 중책을 지내면서 혼란스런 전국시대에 내정과 외교에서 크게 활약을 했다.

당시는 오랑캐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힘을 잃고 수도를 동쪽 성주(成周)로 옮긴 후 여러 제후국들이 독립을 외치면서 살벌한 약육강식이 판을 치던 전국시대였다.

대륙의 남쪽 큰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군세가 약했던 초나라는 강국이었던 진, 제와 국경을 마주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벌여야만 했다.

초나라가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대륙의 주도권이 달라질 만큼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두 강대국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왕은 물론 대신들도 제나라와 친교를 맺자는 친제파와 반대의 친 진나라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초의 회왕이 굴원을 불러 새로운 법령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지금까지 귀족들에게만 주어지던 특권과 부를 온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있는 새 법령을 만들라는 어명이었다.

자신들의 권력이 제약받을 것을 두려워했던 귀족들은 태자인 자란를 충동질하여 굴원을 모함하였으며 결국 회왕은 굴원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한직으로 쫓아내 버린다.

제나라와의 친교를 주장하던 굴원이 물러나자 진나라의 뇌물에 넘어갔던 조정중신들이 왕을 설득하여 제나라를 멀리하고 진나라와 맹약을 맺도록 했다.

이에 화가 난 제나라가 위나라와 연합하여 초를 공격하자 다급해진 초나라는 맹약을 맺은 진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지만 진나라에서는 초나라가 신용이 없다며 태자를 진나라에 볼모로 억류하고 나서야 원병을 보내 제,위 연합군이 물러가도록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볼모로 끌려갔던 초나라 태자가 진나라에서 도망을 치자 이를 빌미로 진나라는 거꾸로 제나라와 위나라를 포섭하여 초를 침입함으로써 초나라는 많은 인마(人馬)와 국토를 잃고 말았다.

그 후로도 툭하면 싸움을 걸어오는 진나라로 인해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초나라가 진을 멀리하고 제나라와 친교를 맺자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진나라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진나라가 회왕에게 무판이라는 곳에서 두 나라 왕이 만나 담판을 짓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초나라는 이를 두고 가느냐 마느냐로 심한 갈등을 했는데 초를 집어삼키려는 진나라의 흑심을 눈치채지 못했던 태자 무리의 강권으로 인해 회왕이 길을 떠난다.

이때 한 필의 백마를 타고 나타난 굴원이 회왕의 어가를 막아서며 진나라는 호랑이 같은 나라로 믿을 수 없으니 가서는 아니되옵니다.’며 돌아갈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그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는 신하들의 아첨소리에 묻혀버리고 속수무책으로 적지를 향해 떠나가는 임금을 바라보던 굴원은 머리를 풀어헤친 체 대성통곡을 했다.

왕이 총명하지 못하고 간신들의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로 막는 것을 근심하며 그 비통한 마음을 글로 적어 남기니 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굴원의 장편서사시 이소(離騷)이다.

진나라로 들어갔던 회왕은 당초의 약속과 달리 진나라에 억류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약소국이었던 초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제나라에 볼모로 보냈던 태자를 귀국시켜 왕위에 오르도록 해야만 했다.

굴원의 간청을 외면하다가 인질이 되어버린 회왕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3년 뒤 적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평전투에서 투항한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땅속에 파묻어 몰살시킬 만큼 잔인했던 진나라 장수 백기가 초나라에 쳐들어와 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불을 지르자 멀리 양자강 기슭에서 이 소식을 접했던 굴원은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다가 돌 하나를 안고 멱라강물에 뛰어들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이 고기에게 뜯길 것을 염려하여 참대광주리에 흰쌀을 담아 강에 뿌리고 용선(龍船)을 띄워 시신만이라도 찾고자 여러 날을 뒤졌으나 허사였다.

이 후 해마다 55일에는 사람들이 굴원의 원혼을 달래고자 강물에 흰쌀을 뿌리고 용선을 띄웠는데 이런 풍습이 후대로 이어지면서 대나무통에 흰 쌀을 담아 강물에 뿌리고 용선경기를 하는 단오날 전통놀이의 유래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충신과 역신의 판단은 역사의 몫

연일 추미애 법무장관의 돌발행동이 전국의 언론매체는 물론 세간(世間)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며 작심한 듯 내뱉는 그의 발언들이 전 언론의 머릿면을 장식하면서 코로나보다도 더 많은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겠다.

어찌보면 그의 좌충우돌식 행동이 국민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이 정부의 불리한 정책들을 따가운 여론으로부터 격리시켜 놓는 효과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추미애 장관이 차기 서울시장이나 일국의 대권을 바라보고 있다면 지금의 그의 언행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 둘 일이다.

역사는 군왕의 바르지 못한 결정을 목숨을 걸고 돌리고자 했던 굴원의 충심이 있었다면 자신의 권력과 영달을 위해 왕을 속이고 나라까지 멸망케 했던 송나라의 진회 같은 역신도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추장관이 판사로서 사람의 잘잘못을 심판하였듯이 먼 훗날 역사도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두려운 마음으로 장관으로서의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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