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탄생설화-율곡 이이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율곡을 낳기 전, 동해의 검은 용이 날아와 집 마루에 스며드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율곡의 어린 시절 이름은 용을 뵈었다는 뜻으로 현룡(見龍)이라 불렸고, 그가 태어난 방에는 지금도 몽룡실(夢龍室)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다 아시다시피,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산수화(山水畵)나 포도 등의 그림에 능하고, 경사(經史-유교 경전과 역사서)에도 널리 통하였으며, 바느질과 자수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을 뿐 아니라, 남편을 잘 섬기고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하여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현재 지폐 5만 원 권에 초상화가 들어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여성 인물이 화폐 도안으로 등장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아 기른 곳이 강릉시에 있는 오죽헌(烏竹軒-건물 뒤에 검은 대나무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붙은 이름. 현재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며, 이 건물의 맨 오른쪽에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이 있다.

이이는 여섯 살 때까지 외가인 이곳에서 자랐다. ‘용꿈이라는 흔하지 않은 태몽을 꾸고 낳은 아이답게, 그는 아주 똑똑하고 영리하였다. 세 살 때 이미 읽고 쓸 줄 알았고, 일곱 살 때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열 살 때는 유교 경전을 비롯한 모든 책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신동이었던 셈이다. 율곡은 8세 때에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던 중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를 치르고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20세 때 산에서 내려와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1558년 퇴계 이황을 방문했고, 그해 겨울의 별시(문과 초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였기 때문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호조좌랑(호조에 속한 정 6 품 벼슬)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68년에는 천추사(千秋使-명나라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외교사절단)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9년 임금에게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1582년 이조판서(2. 오늘날의 행정안전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1583년에는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한 ‘10만 양병설을 건의하였다. 1584년 서울 대사동에서 숨을 거두어 파주 자운산 선영에 묻혔다.

율곡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사건은 ‘10만 양병설이 아닐까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병조판서(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였던 이이는 경연에 들어가 선조에게 10만 양병(養兵)을 건의했다. 학문과 법령에만 치우친 통치로 국방과 군역제도가 허물어진 상태에서 외적의 침입이 일어나면 제대로 방어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나라의 형세가 부실함이 오래되어 앞으로 닥쳐올 화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성(한양)2만 명, 각 도(조선 8)1만 명씩 10만 명을 양병하여 위급한 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경연장(經筵場-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국정을 협의하던 자리)에서는 아무도 이 말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연 직후 유성룡은 지금처럼 태평 무사한 때는 학문을 우선으로 삼아야지, 군대의 일은 급한 일이 아니다.” 하고 반박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이이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592,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제야 유성룡(임진왜란 총사령관)우리는 만고의 죄인이라며,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가볍게 여긴 데 대해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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