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탄생설화-녹두장군 전봉준

전봉준의 아버지가 소요산(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암자에서 글공부를 할 때,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 후 전봉준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녹두장군전봉준(1855~1895)은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 접주(接主-교구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고종의 아버지)과 접촉하여 국정 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892(고종 29)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재산을 빼앗는가 하면, 만석보(정읍시 이평면에 있던 저수지) 아래에 다시 보를 쌓아 불법으로 700섬의 물세를 부과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묵살 당하였다. 18941, 전봉준은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쌓인 곡식을 나눠주고 부패한 관리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를 안핵사(민란 수습을 위해 파견된 관리)로 보내어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용태는 도리어 농민들을 체포·투옥·약탈하고 재산을 불태우고 살인까지 자행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보국안민(輔國安民-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의 기치를 내걸고, 주변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태인, 무장, 금구, 정읍, 부안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일어났으며, 8천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의 산. 온 산이 농민의 흰옷으로 덮여 생겨난 이름)에 모여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할 것’, ‘권세 있고 부귀한 무리들을 없앨 것’, ‘왜적과 서양세력을 몰아낼 것등을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하였다.

이어 전주를 향하여 나아가다가 황토현(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고개)에서 관군을 쳐부수고, 정읍·고창·무장 등지에 이어 428일에는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한 데다 톈진조약(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조약. ‘조선에서 청 · 일 양국 군대는 동시 철수하고, 동시 파병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음) 을 빙자하여 일본 군대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군사 800명을 이끌고 출전한 홍계훈의 화해 제의에 응하기로 하고, ‘탐관오리 응징’, ‘노비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12개 조목의 개혁에 대한 약속을 받고 휴전하였다.
이후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는 한편, 도정(道政)에도 참여하여 감시하였다. 그러나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침략행위를 노골화하는 일본의 행태에 분노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남도(南道) 접주로서 12만의 농민군을 지휘하였으며, 북도(北道) 접주 손병희의 10만 농민군과 연합하여 교주 최시형의 총지휘 하에 대일본전(對日本戰)을 전개하였다. 항쟁의 규모는 한때 중부·남부 전역을 비롯하여 함경남도와 평안남도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무기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공주 우금치(공주시 금학동에 있는 고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하고, 순창에 숨어 동지인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재궐기를 모의하였다. 그러던 중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12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330일 동지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말았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