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선한 영향력-파스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로 잘 알려진 프랑스 출신 파스칼(1623-1662)은 유명한 명상록팡세를 남긴 철학자임과 동시에 뛰어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고, 또 독실한 신앙을 가진 금욕주의자였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세 자녀를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의 아버지(판사 출신 세무감독관)는 재혼하지 않고, 재산을 정리하여 파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외아들(파스칼)의 교육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

교육의 근본원칙은 천재교육과 같은, 필요 이상의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덟 살 때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지만, 파스칼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그 교육을 미루었다. 그리고 무조건 라틴어를 외우기에 앞서, ‘언어의 구조, 문법을 배울 필요성에 대해서부터 가르쳤다. 또 아들이 희랍어와 라틴어를 완전히 배울 때까지는 기하학을 가르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기하학에 대해 질문할 때, 건성으로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열두 살 아들이 원과 직선을 그리면서, 혼자 유클리드 기하학(최근까지 2천 년 동안 기하학의 대명사)을 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혼자 힘으로 여러 명제와 23가지 공리를 풀어낸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그 후부터 자유로이 수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후 수학의 천재파스칼은 아버지의 세금 징수를 도와주려고 계산기를 발명하였다. ‘파스칼리느(탁상형 톱니식 가산기)라 이름 붙여진, 세계 최초의 디지털 계산기였다.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센티미터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역사의 큰 줄기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클레오파트라(기원전 69~기원전 30)는 부왕(父王)이 죽은 뒤, 18살에 15세가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이집트의 왕)가 되었다. 처음에는 나이가 위인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왕좌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때 이집트에 온 로마의 실력자 시저(카이사르)와 연인 관계를 맺는다. 시저의 도움으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한다. 그러나 시저가 비참하게 암살을 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떠오르는 실력자안토니우스와 결혼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이로 인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되고, 악티움 해전에서 그를 물리친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클레오파트라는 39세의 나이로 자살한다. 에 물려 죽었다는 설도 있고,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인 다음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함으로써 그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 했다는 설도 있다.

보통 클레오파트라를 미모의 요부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녀는 많은 책을 읽어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타고난 언어 능력으로 무역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드나드는 수많은 무역 상인들의 모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이 능력을 이용하여 강대국 로마제국을 이용하여 조국인 이집트를 보존하려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녀의 진짜 모습은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리고자 한 세기의 여걸이었다는 것.

또 하나. 로마의 동전에 나타난 그녀의 얼굴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매부리코에 살이 찐 도톰한 모습. 특히 그녀의 코는 이상적인 로마 미인과 비교할 때, 상당히 긴 편이었다. 이에 더하여, 피부마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미모보다는 세련된 몸가짐 및 태도, 현란한 화술(話術)을 이용하여 세계적인 영웅들을 무력화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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