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진 사회복지법인난원 영광노인복지센터장

하나, , , ……. 사십구. ~~”

걷는데 집중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계단을 오를 때 수를 세는 버릇이 생겼다. 숨 한번 고르고 집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402호 앞집 아저씨가 인사를 건넨다.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이번에 현관문 무료로 도색해준다는데 신청했어요?”

, , 안녕하세요! 그래요? 현관문도 도색해 준대요?”

지금 아파트 도색중이잖아요. 신청하면 현관문도 그냥 해 준 다네요. 우리 것 신청할 때 같이 해줄 걸 그랬나 보네.”

402호 아저씨는 10여 년 전, 노인시설을 제법 크게 운영했는데 직원 관리와 보호자 민원이 너무 힘들어서 정리하고 지금은 차량 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은 무슨 일 하냐고 묻기에 노인사업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뒤로 나만 보면 측은지심의 마음이 드는지 고생이 많다며 뭐라도 챙겨준다. 산에서 따온 얼음, 차량 먼지떨이, 화분 분갈이 하면서 키워보라고 주는 화초 등 나를 만나면 그 분 손에 들려 있는 뭔가를 건네준다. 심지어 우리 아파트 돌아가는 소식도 아파트 안내방송 다음으로 402호를 통해 듣는다.

막내 동생 챙겨주는 큰형 같은 402호 아저씨.

신데레라는 어려서 우모님을 이꼬요~ 애모와~~”

막내딸이 오늘도 어김없이 TV앞 무대에서 춤과 노래로 가족들의 시선을 한데 유혹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방에 있던 언니와 오빠는 반드시 공연장에 나와야 한다. 나올 때까지 이름을 부르니까.

박수와 환호 속에 노래가 끝나면 체육시간이다. 지칠 줄 모르는 에너자이저. 구르고 뛰고 점프하고 온 집안이 운동장이다. 이쯤 되면 303호 아래층 미용실 원장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아파트 후문에 미용실이 있어 자주 간다. 미용실을 들어설 때 공손한 태도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쳐지곤 한다.

요즘 들어 더 많이 뛰죠? 밖에서 놀다가 들어오는데도 남은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나 봐요.”

괜찮아요. 아이들 키우면 다 그렇죠. 저도 아들만 셋을 키웠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셋이라는 숫자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간 나에게는 너무나도 위안이 되는 말이다.

두 손 모아 자연히 공손해지는 303.

! 사모님 안 계시네요. 어디 가신 것 같은데 이따가 올게요.”

세탁물 가지고 갔다가도 여사장님 없으면 그냥 돌아서서 나온다. 후문 세탁소 남사장님은 수선은 잘 하는데 누가 와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하던 일만 한다. 내가 다녀 간지도 모를 것이다.

세탁물 실수 한 번 없었던 믿음직한 여사장님이 유리 너머로 보이면 무척이나 반갑다.

안녕하세요! 드라이 좀 맡기려고요.”

어서 오세요. 여기에 담아 주시고~.”

컴퓨터 모니터를 한번 쳐다보고는 , 지난번에 맡긴 거랑 사모님하고 딸이 맡긴 것도 있네요.” 말이 끝나면 벽 모서리에 우뚝 서 있는 U자형 쇠막대를 오른손으로 움켜쥔다. 그러고는 수 천벌의 옷들이 매달려 있는 천장에서 왼손을 제쳐가며 우리 집 것만 쏙쏙 빼낸다. 나도 같이 고개 들어 쳐다는 보지만 어떻게 찾아내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행여 옷이 바뀔까 하는 마음에 내가 먼저 403호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여사장님이 먼저 동 호수를 물어본 적은 없다.

퍼즐 맞추기의 달인 세탁소 여사장님.

언제부턴가 사람을 기억할 때 형용사, 동사, 명사 등으로 이미지를 연상하는 습관이 하나 더 생겼다.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의 인상적인 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버스터미널이 가까운 이 동네에 산지 11년째다. 주민들 이름은 모르지만 몇 동 몇 호로 이야기 하면 머릿속에 그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다. 나는 이웃에게 어떤 이미지의 403호일까? 우리는 이웃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날이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