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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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

중국의 춘추시대 진나라()에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장차 진나라의 22대 군주가 될 공자 중이(훗날 진문공)가 국내 정변을 피해 망명생활을 하던 시절 고난을 함께하며 수행했던 가신(家臣)이었다.

춘추시대 진나라(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나라와 다른 나라)의 내정은 매우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진헌공이 여희라는 후궁의 꾐에 빠져 태자였던 신생을 죽이고 다른 아들들에게도 위험을 다가오자 둘째 아들이었던 중이는 가신들을 거느리고 국외로 탈출을 했다.

기약없는 망명길에 올랐던 중이 일행은 장장 19년 동안이나 타국을 떠돌았는데 이때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가신 중 한 사람이 개자추였다.

공자 중이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고 있을 때 그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여 올렸다는 데서 유래된 할고봉군(割股奉君 허벅지 살을 베어 주군을 받들다)은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으면서도 주군을 떠나지 않았던 개자추의 충심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고자성어이다.

오랜 망명생활을 접고 진나라로 돌아온 중이는 무능한 조카 회공(懷公)을 몰아내고 군주위에 오른 후 공명정대한 정치로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며 천자국(天子國) ()나라에 파병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는 등 봉건 제후국들을 선도함으로써 두 번째로 춘추5(春秋五覇)에 올랐다.

논공행상에서 제외된 충신 개자추

제위에 오른 진문공 중이는 먼저 논공행상을 통해 자신의 망명생활을 수행했던 모든 신하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하사했다.

하지만 공신 중의 공신이라 할 수 있었던 개자추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개자추는 문공께서 돌아와 군주의 자리를 이은 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그런데 몇몇 인사들이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떠벌리고 있으니 이는 어찌 공과 상을 탐내 군주를 속이는 짓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런 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어머니를 모시고는 산으로 숨어버렸다.

그가 논공행상으로 고심하는 주군을 위해 일부러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백성들은 그를 동정하며 궁궐 곳곳에 용이 하늘로 날면서 다섯 마리 이무기가 보좌하더니 용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네 마리 이무기가 각자 그 자리를 차지하는구나. 오직 한 마리가 원망하니 그 간 곳을 아무도 모르는 도다.”라는 방을 써 붙였다.

문공은 이런 사실을 전해 듣고 그건 바로 개자추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군왕이 되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된 것도 개자추의 공이 큰데 그를 비굴하게 만들고 말았구나.”라며 급히 사람을 보내 개자추의 행방을 찾게 했다.

한식(寒食)의 유래(由來)

개자추가 어머니와 함께 면산에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문공이 몸소 면산으로 가 찾았으나 더 깊이 숨어버린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면산이 워낙 험하고 깊은 산중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찾을 길이 막막했던 문공이 한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산에 불을 지르도록 했다.

불이 번지면 효자로 이름난 개자추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올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이 3일 밤낮으로 탔으나 개자추 모자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불이 온 산을 태우고 꺼진 뒤에야 나무 밑에서 끌어안은 체 까맣게 타죽은 모자를 발견했던 문공은 땅을 치며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문공은 개자추 모자를 기념하기 위해 면산을 개산으로 고쳐 부르게 하는 한편, 그 일대 지역을 개자추가 쉬었다는 뜻의 지에시우(介休) 으로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또 매년 면산에 불을 지른 날(청명절 하루 전날)을 한식(寒食)날로 정해 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은 불에 탄 면산의 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서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개자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1년을 남겨두고 장관 임명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관후보자들이 누구보다도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을 섰던 분들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진문공이 춘추5패가 되었듯 성공하는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때로는 자신을 되짚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도 도리가 아닐까.

눈앞에 있는 벼슬을 탐내 동문수학했던 벗(한비자)마저 죽였던 이사는 영원한 역신으로 남아 욕을 먹는 반면 벼슬을 마다하고 산으로 들어간 개자추를 한식날까지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는 것도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초등학교 시절 배웠던 격언이 더욱더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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