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숙 시인

박혜숙 시인
박혜숙 시인

걸언(乞言)은 말씀을 빌린다는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목민심서<애민편(愛民編)>에 써놓은 내용이다. 긴 유배기간동안 저술했던 500여권의 책 중에서 제법 낯이 익은 책이다. 목민(牧民)이란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이고 심서(心書)는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관리들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마음에 새겨둬야 할 덕목을 제시해놓은 것이다.

최상의 고위관리이던 신분에서, 죄인이 되어 유배생활을 하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고 듣고 겪으며 써 내려간 목민심서는 다산 정약용의 애민사상(愛民思想)을 기반으로 진정으로 백성을 돌보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관리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목민심서애민편의 첫 조항에는 <양로(養老)>라는 내용이 있다.

해마다 음력 9월이면 임금이 80세 노인들을, 왕비는 80세 부인들을 궁전에 불러다가 잔치를 베푼다”(每歲季秋 王宴八十老人於殿 妃燕八十婦人於宮)라는 글이다.

양로는 힘없고 가난한 늙은 노인들을 돌봐주는 일인데 걸언례(乞言禮)라고 하고 고을 안의 80세 이상 노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옛 시절에는 환갑잔치도 큰 의미를 뒀던 때인데 팔순 잔치는 대단한 영예였을 것이다.

단순히 잔치로 끝난 것이 아니고, 노인들의 입을 통해 백성들의 고민이나 고충을 듣고 지적사항이 있으면 시정할 방법까지 들었다고 한다. 장수하기가 힘들어서인지, 노인들의 권위와 지혜를 구하려 했고 나라에서는 크게 공경하고 그 직언을 경청하는 예를 치렀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양로(養老)의 예절을 지키는 데에는 반드시 걸언(乞言)’의 절차가 있어야 하니,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의논하고 아파하는 부분에 대해 물어서 예절에 합당하도록 해야 한다”(養老之禮 必有乞言 詢瘼問疾 以當斯禮)라 고 하여 걸언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의 노인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00,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어서며 고령화사회에 진입했고 2017년 고령화율 14.2%로 고령사회가 됐다. 2025년경에 그 비율이 20%가 넘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전남은 이미 초고령사회가 되었으며 20.7%로 현재 17개 광역시도 중 노인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

노인들에겐 십중팔구 바라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 불청객은 대체로 노인사고((老人四苦)라는 말로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 병고(病苦). 노인이 되면서 약봉지가 보따리를 이룬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의료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쨌든 병원 가까이에 사는 것이 최고일 것이다.

둘째는 빈고(貧苦). 젊어서 벌어놓은 재산을 자식들의 교육과 양육에 다 써버려서 대다수의 노인들은 빈털터리가 되어 있다. 집 한 칸도 생활고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는 실정이다.

셋째, 고독 고(孤獨苦)이다. 핵가족화가 이루어지면서 외로움을 주체할 길이 없다. 배우자가 생존하면 다행이지만, 홀로 생활한다면 100세 시대를 어찌 견뎌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넷째는 무위고(無爲苦)이다. 일찍 정년퇴임을 당하고 대개는 하는 일이 없다. 아파트 경비원이나 소소하게 부업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적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인들에게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생활 안정을 지원하는 기초연금제도를 실시 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 중 재산이 적은 노인에게 매달 일정 금액의 연금을 지급한다. 나라가 어르신들에게 용돈을 드리는 효도를 하고 있다. 코로나로 어려워진 시절에 더욱 그 진가가 드러나는 제도인 것 같다. 노인인구 대부분이 혼자 생활하는 상황에서 매월 일정 금액의 지원금은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옛 시절 걸언 하던 나이의 어르신들이 이젠 부지기수다. 모셔와 이야기를 듣던 어르신들이 이젠 매일매일 지역사회 곳곳에서 고충을 호소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만큼 귀를 기울여야 할 일이 많아졌다. 모셔와서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마땅히 찾아가서 물어볼 일이다. 세월의 지혜를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삶의 지혜는 노인의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걸언례로 어르신들께 예()를 다 해야 할 일이다.

누구나 늙는다. 우리도 노인이 된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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