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과 문제아(6)-니체

니체(1844-1900. 실존주의 철학자)는 독일 동쪽 지역의 작센 주 뢰켄에서 기독교 목사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공주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하다가 왕의 특별한 배려로 뢰켄의 목사가 되었다. 니체가 태어난 날은 왕의 생일 축제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 이름을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지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밤늦게 집에 돌아오다가 현관 앞 층계에서 넘어져 뇌진탕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스물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아내와 세 자녀를 뒤에 남긴 채. 그리고 여덟 달 후에는 니체의 두 살 난 남동생 요세프마저 죽고 말았다. 이제 다섯 살의 니체는 외가로 옮겨가 외할머니와 어머니, 노처녀인 두 이모, 그리고 여동생 틈에서 자라났다. 이 여인들은 집안에 하나 뿐인 사내 니체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그로 하여금 섬세하고도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게 만들었다.

니체는 서양 철학자 가운데 기독교를 가장 호되게 비판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원인을 성장 환경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 아버지가 목사이고 어머니도 목사 집안 출신인 니체가 기독교를 등진 까닭이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여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부담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데 대한 상실감,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걸핏하면 엄마를 구박한 집안 여자들에 대한 분노가 그렇게 표출되었다는 것.

꼬마 목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경구절과 찬송가를 기가 막히게 외웠고, 열네 살 때에 자서전을 쓸 준비를 하였으며, 음악과 독일어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였던 니체는 어느 날부터 학교의 엄격한 분위기와 고리타분한 도덕을 비웃으며 반항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은 그가 학생들을 감독하고 그 보고서를 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조금 장난기가 섞인 익살스러운 내용으로 기록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걸 읽은 선생님들이 토요일에 그를 종교재판에 참석시킨 다음, 세 시간 동안이나 가둬놓는가 하면 또 몇 번이나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벌칙을 내리고 말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니체는 본(Bonn) 대학에 들어갔고, 입학하자마자 자신의 부족한 사교성을 개발해보기 위해 대학생 사교모임에 들어갔다. 니체는 회원들과 함께 극장을 드나드는가 하면 담배와 술, 그리고 여자에 깊이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얼마 가지 않아 싫증을 느끼고 탈퇴해버리고 만다.

그는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과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기독교에 대한 의심으로 머리가 복잡해있던 차에 마침 리츨(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자유주의 신학의 거물) 교수의 권유도 있고 해서 결국 신학을 버리고 만다. 이듬해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간 니체는 본(Bonn) 대학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문헌학 연구에 정열을 쏟는다.

어느 날, 니체는 헌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사서는, 새벽 6시부터 다음날 밤 2시까지 꼬박 2주일에 걸쳐 읽어낸다. 그리고는 쇼펜하우어는 꼭 나를 위해서 이 책을 써놓은 것 같다.”고 중얼거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철학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반드시 허무주의가 찾아올 것을 일찍이 예언한 실존철학(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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