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과 문제아(7)-야스퍼스

야스퍼스(1883~1969)는 독일의 작은 도시 올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은행장과 주 의회 의원 및 시의회 의장, 유리공장의 감독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농촌 출신인 어머니는 비록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매우 지혜로운 아내이자 현명한 어머니였다.

부모가 아들에게 요구한 것은 성실, 근면할 것,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단할 것등이었다. 강제적인 명령이나 매질은 한 번도 없었다. 또 야스퍼스 가정교육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적인 것을 철저하게 무시한다는 점이었다. 하나님은 대화의 주제가 되지 못하였고, 어쩌다 목사 이야기가 나오면 야유가 일어나곤 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야스퍼스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배운 성경과 신앙문답서, 교회사의 내용은 그의 머릿속에 남게 된다.

야스퍼스는 어린 시절부터 늘 몸이 약했다. 젖먹이 때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아 기침하기 일쑤였다. 또 밤에는 심한 천식에 시달렸으며, 머리와 무릎에는 습진이 생겨 피부병을 앓기도 했다. 야스퍼스는 모범이 될 만한 영재는 결코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약 30명 가운데 6등 정도였고, 그 후에는 20명 가운데 3등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졸업할 때에는 필기시험을 우수하게 치러 구두시험이 면제될 정도였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늘 낙제를 당할까봐 불안해했다. 노력을 많이 기울이지 않아도 수학은 늘 우수했다. 하지만 어학 쪽은 매우 약했다.

야스퍼스의 김나지움(·고등학교) 시절은 굴욕과 반항, 고독과 자아 성찰을 통하여 인격이 형성되어가던 때이다. 어느 날, 그는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체육시간에 윗옷 벗는 일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교장까지 개입하는 등 사건이 크게 번지자, 결국 형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학교에는 교장으로부터 허락 받은 세 개의 학생 조직이 있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어느 하나에 가입하고 있었다. 세 개의 조직 가운데 오브스크라에 고급 관료나 장교, 부자들의 자녀들이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야스퍼스도 여기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분이나 계급 등을 가지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또 거창한 의식도 싫다.”는 이유를 들어,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혼자만 따로 떨어져 다니는 야스퍼스를 두고 모두들 비웃었다. 이에 그 아버지는 아들을 사냥에 데리고 다니고자 했다. 그러나 몸이 약한 야스퍼스는 산과 들에서 행해지는 사냥놀이를 오래도록 이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서 책만 읽었다.

그의 타고난 반항 정신은 졸업을 앞둔 사은회에서 폭발하고야 말았다. 교장이 라틴어로 답사를 하자, “우리와 이 식장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불평한 것이다. 이에 교장은너는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어!라고 비난하며, 그를 바로 퇴장시켜 버렸다. 이러한 일들이 평생 하나의 정신적 외상(外傷), 즉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그는 너무나 자주혼자 있는 듯한느낌을 가졌고,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하고만 교제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심지어 가장 절친한 친구와도 자주 헤어지곤 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야스퍼스는 4년 연상인 유태인 여학생과 결혼하고, 건강을 위해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 덕분에 88세까지 살면서 자신의 학문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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