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걸 한국재난안전뉴스 대표

영광 문화유산의 원류를 찾아서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시골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독대 위에 정화수 한 그릇 올려놓고 시골집 어머니들은 정성을 다해 빌고 빌었다. 그 정화수 그릇이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상이다. 우리 산뿐만 아니라 명산 꼭대기 인근 바위에는 알터가 있다. 바위에 구멍을 내서 그곳에 물 또는 동물의 피를 제물로 올리고 기도를 했다. 불교 포교 이전의 흔적들이다. 그곳에 불상이 들어선 곳이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이다. 기원전 5세기와 기원후 5세기 천년 동안 이 지역은 로마, 그리스, 인도, 중국을 소통시키는 요충지대였다.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대승불교와 불상은 지금의 중앙아시아 전역과 인도, 중국, 한국까지 전해졌다.

 

종교간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불상

불교사에 특이한 점은 이교도와의 화합과 소통을 통해 이교도들을 불교로 개종시켰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십자군 전쟁도 결국 이교도와의 전쟁을 통해 강압적으로 타 종교를 짓밟는 종교 전쟁사였다. 하지만 쿠샨 왕조 시절 카니시카 왕은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지만 불교로 개종해서 대승 불경과 불상을 조성하면서도 종교 간 공존을 꾀한 성인이었다. 당시 발행한 은화나 금화를 보면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불()이나 신, 그리고 다른 종교의 신들을 불상과 함께 앞뒤 면으로 새겼다.

이후 점차 스님을 왕사로 둔 영향을 받아 인도의 윤회사상을 도입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불교로 발전시켰다. 쿠샨 족에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보다는 이타행을 바탕으로 한 불교 교단의 유지 발전에 있었다. 여기에서 대승불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불경과 함께 84천 개의 불상과 불탑을 세우는 원을 세우고 실제 조성했다고 한다. 세계에서 단일지역에 불상과 불탑이 가장 많은 곳이 간다라지역이다. 그 불상과 불탑을 보면 로마계, 이란계 유목민, 인도 힌두 양식을 다양하게 가미한 흔적들이 보인다. 초기에는 부처님의 전생도를 묘사하는 불상에서부터 세월이 지남에 따라 현생과 내생까지를 표현했다. 그러는 동안 점차 간다라 고유의 불상으로 이어졌다. 간다라 불교 유적을 보관 중인 라호르, 탁실라, 페샤와르 주요 박물관이나 탑이 조성된 곳을 보면 그 느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것만 봐도 종교란 포용과 융합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쿠샨 왕조 시대의 동전에는 물론 간다라 지역 많은 불상과 보살상의 대좌에 조로아스터교의 불을 숭배하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쿠샨 왕조 당시 불교를 믿기 이전에 조로아스터교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012년 간다라 성지 순례에 동행한 전 한양대 교수 민희식 박사는 현지 박물관과 불탑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카니시카 왕도 라바탁 명문에 새겨진 것을 보면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인 나나를 주재 신으로 하여 다른 모든 신 앞에서 왕위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라고 소개했다. 쿠샨 왕조가 수립된 곳이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였고 쿠샨 왕조의 많은 동전과 불상, 보살상의 대좌에 불을 숭배하는 장면을 조각한 것으로 보아 조로아스터교의 아나히타 신을 나나로 부른 것이 확실하다라고 덧붙였다. 카니시카 왕이 초기에 발행한 동전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신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훨씬 나중에 불교를 믿은 것으로 추정된다. 카니시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후에 스님을 왕사로 모시고 불교 경전을 공부하였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 간에도 불교 교리에 대해 백가쟁명을 하는 것을 보고 당시 간다라 일대 모든 스님을 모셨다고 한다. 그곳이 간다라 인근 캬슈미르였다. 4차 결집을 했다. 종파간 의견을 수렴하고 화합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교도 간 화합 차원에서 대승불교가 태동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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