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2)-석가모니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기원전 566-486) 역시 왕족 출신이다. 석가는 그가 속한 종족인 사키야(Sakya)의 이름이고, 모니는 성자(聖者)라는 뜻이며, 싯다르타는 어렸을 때의 이름이다. 석가모니는 지금의 네팔에 해당하는 카필라에서 성주(城主)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반왕(중인도 가비라위국의 왕), 어머니는 마야(구리성 선각왕의 누이동생)로서 인도의 명문 혈통을 가진 호족(豪族)에 속하였고, 대대로 왕통을 계승하여 내려온 귀인 집안이었다.

석가모니를 잉태하였을 때, 마야 부인은 다음과 같은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어느 날 네 명의 왕에게 납치되어 은산(銀山)의 꼭대기에 있는 황금의 궁전에 끌려갔는데, 거기서 은색의 콧등에 연꽃을 달고 있는 하얀 코끼리가 그녀의 주변을 세 번 돌고 나서는 오른쪽 무릎에 앉았다는 것. 이에 정반왕은 예순네 명의 지혜로운 승려들을 불러 왕비의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 해몽은 이것이었다. “왕비가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며, 이 아이가 집에만 머물러 있으면 능히 왕이나 세계의 지배자가 되겠지만, 그가 자기 아버지 곁을 떠난다면 세계에 관한 무지를 벗겨버릴 만한 대각자(大覺者, 크게 깨달은 자)가 될 것이외다.”

드디어 마야 부인이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돌아가던 중, 룸비니(네팔 남동부 테라이 평원에 있음)라는 동산에 이르렀다. 피곤하여 잠시 쉬는 동안 무우수(無憂樹)에 오른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는 순간, 오른쪽 겨드랑이 밑을 뚫고 석가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사방팔방으로 일곱 걸음을 떼고 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이라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마야 부인은 아이를 낳은 지 7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에 정반왕은 고대 왕조의 족내혼(族內婚, 혈연집단 안에서 우선적으로 결혼함) 제도에 의하여 마야 부인의 여동생인 마하파사파제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양육하게 하였다. 이때 석가가 받은 교육으로는 철학, 미술, 공예, 건축, 역산(曆算-달력과 산술에 관한 학문), 음악, 의학, 논리 등이었다. 또한 이밖에 64종류의 문예(文藝)29종의 무예(武藝)를 익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매우 영리하여 일곱 살 때에 학예와 무술을 통달하였고, 점점 커갈수록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진리에 대해 명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열여섯 살 때에는 구리족의 아름다운 여인 야수다라(구리 성주 선각왕의 딸, 석가의 외사촌)와 결혼하여 라훌라라는 아들을 낳기도 하였다.

석가의 아버지 정반왕은 아들에게 왕좌를 물려주고자 하였고, 이에 현실세계의 어려움과 상관없는 좋은 상태에서 부귀에 넘치는 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어느 날, 석가는 수레를 타고 길을 가다가 사람의 네 가지 모습을 차례로 보게 되었다. 첫째는 늙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 둘째는 높은 열로 고통 받는 병자, 셋째는 이미 썩어버린 시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의 고통을 초월하여 안식을 누리는 승려였다. 이에 그는 모든 부와 명예, 권력, 가족을 버리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석가가 출가하게 된 배경에는 현실에 대한 그 자신의 애착이 도리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아버지와 친척들과 영원히 함께 살고자 하는 열망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강했던 석가가 이 세상의 덧없음에 경악하여 차라리 영원한 구도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모인 마하파사파제, 아내인 야수다라, 아들인 라훌라는 모두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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