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걸 한국재난안전뉴스 대표

영광 문화유산의 원류를 찾아서

전술한 바와 같이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쿠샨 왕조의 카니시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후에 불교 경전과 불상을 처음 편찬하고 조성했던 곳이 지금의 실크로드로 불리고 있는 간다라 지역이다. 이곳이 고대 로마, 그리스로 불리는 서양과 인도와 중국이라는 동양을 연결하는 비단길 중심부였다. 그 비단길에서 동서양 문화 문명의 융합으로 꽃피운 것이 불상과 불탑이다. 불상과 불탑은 동서양의 사상을 불교식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그리스 조각가들이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신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전생도를 불상과 불탑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카니시카 왕은 조로아스터교의 예배 의식을 위주로 힌두교, 그리스 신 등 당시 다양하게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예배 의식을 수용하면서 불교를 국가 종교로 삼았다. 카니시카 왕이 다양한 민족과 종교와 문화를 불교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들 신의 초상을 대신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전생과 일대기를 조각하여 불탑과 사원을 장엄했다. 이를 계기로 간다라 지역에서 불경과 불상은 포교의 성스러운 상징인 성물(聖物)로 포교의 최일선으로 나간다.

1638년전 불법과 함께 불상과 불탑 고스란히 백제에 전파

필자가 지난 2012년 간다라 지역인 파키스탄 불교 유적지 순례 중 백제에 불법을 전파한 마라난타 스님의 탄생지를 순례하는 동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 장엄하면서도 곡선미가 아름답게 조성돼 있어 놀라웠다. 그 사리탑을 축소한 형상이 전국 사찰 중 유일하게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 대웅전 지붕 중앙에 조성되어 있다. 수많은 전란으로 인해 중창 불사하는 중에도 그 형상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에 불법을 펼친 상징이기 때문이다.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민희식 공저 마라난타에 따르면 불갑사가 백제에 첫 사찰로 창건된 이후 백제지역 곳곳에 불법이 전파된다. 불교를 체제 사상으로 수용한 카니시카 왕처럼 백제 15대 왕 침류왕 원년인 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왔다고 나와 있다. 마라난타 스님이 지금의 중국 절강성에서 해류를 따라 백제에 온 것이다. 침류왕은 마라난타 스님을 궁으로 모시고 왕사로 삼아 예우했다는 기록이다. 이후 17대 왕인 아신왕이 385년에 교령을 내려서 불법을 신봉하여 복을 구하라고 불교를 공인 국교로 천명했다. 이때 마라난타 스님은 절을 세우고 10명을 제자로 삼아 백제에 불교를 전파했다는 기록이다. 침류왕 왕사로 초빙된 마라난타 스님은 그냥 오지 않았다. 불경을 포함한 불상 등 성물을 함께 가지고 왔다. 간다라 문화 문명의 상징물인 불상과 불탑 등 수많은 불교 관련 성물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637년 전인 384년 백제 침류왕은 마라난타 스님의 법력을 전해 듣고 간곡한 삼고초려 끝에 그를 왕사로 모시게 된다. 마라난타 스님은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스와트, 탁실라지역의 최고 계급층에 속하던 브라만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브라만 계층의 아들은 후계자수업을 위해 천문학, 의학, 고고학, 수학, 역사학 등을 섭렵해야 했다. 수학을 마치고도 마라난타 스님은 브라만 계층의 후계자 대신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의 길을 택했다. 이후 불법 포교의 대장정에 나섰다. 마라난타 스님은 백제 침류왕의 간곡한 초청으로 백제에 처음으로 불법을 전파하러 온 것이다. 단지 불법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문화가 융합돼 화려하게 꽃 핀 간다라 문화 문명도 함께 백제에 전한 것이다.

불두가 신비스러운 성물(聖物)로 호위무사 역할

지금이야 정보통신의 발달로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세계 곳곳의 날씨 정보와 배 비행기 등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옛날에는 별을 보고 날씨를 가늠해야 할 때인지라 마라난타 스님 일행이 백제로 가는 바닷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마라난타 스님이 출발하기에 앞서 스승에게 작별을 고하자 스승은 불도(부처님 머리 상)를 건네면서 혹시 항해 중 풍랑이 일어 배가 위기에 처할 시에 이 불두를 바다에 던지라 했다. 바람에 의지해야 하는 돛단배의 항해 길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였던 시절이었다. 마라난타 스님 일행은 항해 길에 폭풍우를 만나자 스승의 당부대로 불두를 바다에 던져 순탄한 항해 끝에 굴비로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구에 안착했다. 놀랍게도 마라난타 스님 일행을 태운 배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이미 바다에 던졌던 불두가 먼저 포구에 도착해 있었다. 마치 불두가 배의 기착지를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불두는 지금 마라난타 스님이 기착한 법성포 어느 노보살님이 사당을 모시고 조석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법성포의 지명은 불법(佛法)을 전하려는 성인(聖人)이 온 포구라 해서 법성포(法聖浦)라 한다. 이전 지명은 아미타불이 온 곳이라 해서 아무포(阿無浦)라 했다가 법성포로 바뀌었다. 또 마라난타 스님은 본인 일행이 탄 배보다 바다에 던진 불두가 먼저 포구에 와 있던 기연을 침류왕에게 진언해 인근 모악산에 사찰을 창건하고 이름을 불갑사로 명명했다는 이야기다. 불갑사(佛甲寺)는 부처 불(), 첫째 갑(), 부처님을 모신 첫 번째 사찰이라는 의미다. 불갑사가 위치한 모악산 8부 능선에는 해불암(海佛庵)이 있고, 인근에는 부처님 손자라는 뜻을 지닌 손불면(孫佛面) 등 불가와 인연이 있는 지명들이 영광군 인근 곳곳에 있다. 이는 마라난타 스님이 부처님의 후손이라는 뜻이자 바다를 통해왔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 혜초스님 340여년만에 마라난타 스님 고향 답방으로 쓴 왕오천축국전

신라 스님인 혜초 스님이 723년부터 727년까지 천축국 다섯 나라를 순례하면서 그들 나라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기록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바로 지금의 간다라 지역이다.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 그리고 보통 중동으로 분류되는 페르시아(이란)까지 여행한 기록이다.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8세기 인도,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세계 4대 여행기이자 순례기로 꼽히고 있다. 그 혜초스님은 불교의 고향 천축국을 순례했지만, 마라난타 스님은 그 천축국에서 340여 년 전에 백제로 온 것이다. 수백년만의 답방이라고 볼 수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지난 1908,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중국 간쑤성의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서 당시 장경동을 지키고 있던 왕원록에게서 희귀한 고서를 사들였는데 그중에 왕오천축국전이 끼어 있었다고 한다. 본래 3권으로 편찬되었으나 현존 본은 그 약본으로 앞뒤 부분은 유실된 체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왕오천축국전이 중국 둔황에서 발견돼 당나라 출신 스님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 1915년 일본의 사학자 타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신라 혜초 스님임을 입증한 것으로도 일화를 남겼고 한국이 아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는 점도 기연이다.

뒤늦게 조명 받고 있는 마라난타 스님

우리는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기억하지만,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 왕사로 백제불교의 시조라는 점을 역사의 그늘로 잊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 유입과정을 보면 유일하게 백제만 왕이 마라난타 스님을 왕사로 모시고 불교를 국교화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아도화상과 묵호자로 불리는 스님들이 숱한 곡절 속에 전파한 점과는 비교된다.

불교학자들에 따르면 이처럼 백제에 불교가 왕실로부터 전파된 점은 마라난타 스님이 궁중에 머무르며 왕과 왕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숱한 이적을 보여 불법을 찬탄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실제로 해동고승전에는 마라난타 스님의 이적을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하늘과 땅이 일어날 때

대개 재주 자랑하기 어려운데

스스로 깨우쳐 노래와 춤으로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 눈뜨게 하네.”라는 대목이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문화 문명의 상징인 불두가 성물로 바닷길을 잠재우고 등대 역할을 하는가 하면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 왕실에 불법과 함께 여러 이적을 보였다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흔히 불가에서 사리탑과 불전에서 일어나는 방광이라든가 사리 분과, 그리고 불사 회향식에 나타나는 오색 무지개 등의 희유한 현상에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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