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3)-아우렐리우스

명문집안 출신이었다가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가 있다. 본래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로마의 최고통치자인 집정관을 세 번이나 지낼 정도로 유명했다. 민회의 투표를 거쳐 선출되는 집정관은 군사와 행정 분야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뿐 아니라, 필요할 때에는 원로원과 민회를 소집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황제의 아들이 아닌 아우렐리우스가 어떻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서기 121년 로마에서 태어난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養子)가 되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전임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의 오랜 친구이자 친척이기도 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사위였다. 그랬던 그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황제는 그(안토니우스)의 후임 황제로 아우렐리우스까지 지명해둔다. 하드리아누스 입장에서 아우렐리우스는 먼 친척뻘의 손자에 해당했던 바, 그는 자신의 양손녀(養孫女)를 아우렐리우스의 배필로 정해놓고 약혼까지 시켜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혈통(?)으로 대를 잇겠다는 욕심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이 욕망을 처참하게 짓밟은 사람이 바로 안토니누스이다.

안토니누스로 말할 것 같으면, 귀족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22녀를 낳았었다. 그러나 두 아들과 큰딸은 자녀도 없이 일찍 죽고 말았다. 남은 건 막내딸뿐이었다. 이에 그는 즉위하자마자 아우렐리우스 부부를 갈라서게 한 다음, 자신의 딸을 아우렐리우스의 배우자 자리에 앉혀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즉시 사위가 된 아우렐리우스에게 서둘러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황제의 계보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기 145년 황제로 즉위한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5명의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재위기간 내내 이런저런 전쟁으로 시달려야 했다. 추위에 떨면서도 항상 최전선에 서야 했으며, 틈틈이 로마로 돌아와서는 국정은 국정대로 또 살펴야 했다. 이처럼 고된 생활 속에서도 성실하고도 근면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제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똑같은 군복을 입고,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가 이처럼 사치와 안락을 물리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 스토아학파(금욕주의)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자들은 진정한 행복이란 쾌락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지키고 정욕을 포기하는 데서 얻어진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덕을 얻기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으며, 이 때문에 심지어 숨을 멈추거나 밥을 굶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도 있었다. 아우렐리우스 역시 쓸데 없는 욕망을 버리고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우렐리우스 치세의 말년에는 외국군대의 침입이 잦았을뿐만 아니라 전염병까지 유행하여 4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와중에 병을 얻게 된 아우렐리우스는 마침내 도나우 강가의 어느 군대 막사에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전쟁 중에도 짬을 내어 기록한 그의 유명한 저서명상록가운데에는 금욕주의적 철학자로서의 묵상과 황제로서의 격무라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의 고통이 담겨 있다. 그에게 있어 철학자와 황제의 길은 닮아 보이면서도 다르고, 달라 보이면서도 같은 것이었다. (영광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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