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5)-베이컨

영국 경험론의 선구자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은 런던에서 궁정대신과 그의 둘째 부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옥새상서와 대법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옥새상서(玉璽尙書)란 왕의 도장을 관리하면서 왕의 명령을 공식화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옥새상서는 왕의 최측근 관직으로서, 왕의 뜻과 명령을 하늘처럼 받들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직책이다. 더욱이 베이컨의 이모부 윌리엄 세실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최측근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열두 살 때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 베이컨은 이 시절,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만난다. 당시 여왕은 베이컨의 뛰어난 지능에 감탄하며, 그를 젊은 옥새상서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 대학을 자퇴하고 만다. 중세 기독교 철학을 공부하도록 강요받은 데 대해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그 후, 프랑스 파리에 가서 3년 동안 머물며 문학과 과학을 공부하였다. 이동안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국으로 돌아와 보니 유산은 이미 큰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세 자녀와 손위 형들에게 돌아가버렸고, 막내인 그에게 돌아오는 몫은 한 푼도 없었다. 형편이 어려워진 베이컨은 당시 수상(首相)인 큰아버지를 비롯하여 가까운 친척들에게 취직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냉담한 거절 뿐이었다.

출세하기로 맘먹고 그레이즈 법률학원에 들어간 베이컨은 스물 한 살 때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타운톤 시의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후 선거 때마다 승리하였다그 후 베이컨은 검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애인이라고까지 소문이 난 2대 에식스 남작에게 도움을 청했다. 남작은 그 요청을 거절하는 대신 자신의 부동산을 선물했고, 베이컨은 이를 팔아 상당한 돈을 벌었다그러나 얼마 후 남작은 여왕의 청혼을 거절한 데 이어 런던에서 대중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이를 미리 알아차린 베이컨이 여러 차례 말렸으나 남작은 끝내 반란을 추진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베이컨은 여왕 앞에서 그를 끈질기게 변호하여 풀려나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남작은 또다시 반란군을 모아 런던으로 진격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당시 검사국에 있던 베이컨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하였고, 남작은 결국 사형언도를 받아 처형되고 말았다. 이 일로 베이컨은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 참사의원의 딸과 결혼한 베이컨은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또다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검사차장과 검사장, 검찰총장, 궁정대신을 거쳐 56세 때에는 옥새상서로까지 초고속 승진을 한다. 지난날 자신의 아버지가 맡았던, 바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로써 베이컨은 자신이 태어났던 템즈강 강가의 요크 하우스, 즉 옥새상서의 관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듬 해에는 왕 다음의 자리인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으며, 남작(다섯 번째 작위)과 자작(네 번째 작위), 기사(최고의 훈장을 받은 사람에게만 수여)의 작위를 잇달아 받은 다음 왕의 법률고문 자리까지 꿰차게 된다. 이 무렵,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까지 출간함으로써 권력의 최고점에서 철학까지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베이컨은 대법관이 된 지 3년 만에 뇌물수수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런던탑(당시에는 감옥의 역할을 함)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4일 후에 왕의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4만 파운드의 벌금도 면제받았다. 석방된 베이컨은 고향의 옛집으로 옮겨갔고, 이후로는 악화된 건강을 치료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할 때를 제외하고는 두문불출하며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영광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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