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신문 편집위원·영광군가족센터장

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노자의 색동옷과 백유의 회초리

중국 춘추시대 말기, 도가학파를 창시한 노자(老子)7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부모님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했다.

노자의 색동옷 효행은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큰 감화를 주었으며 이를 통해 효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충()에 이어 효가 나라 근간을 이루는데 최고의 덕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는 조선 선조조()의 농암 이현보가 부모의 효도를 위해 외직을 자청해 지방으로 내려갔으며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는 삽화가 실려있다.

소학(小學) 계고편(稽古篇)에도 효자 백유(伯兪)의 이야기가 있다.

백유가 잘못을 해 그 노모가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는데 평소와는 달리 매를 맞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모친이 아들에게 물었다.

다른 날에는 회초리를 맞고도 네가 우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무슨 연고로 우는 것이냐?”

어머니의 물음에 백유가 눈물을 훔치며 대답하기를 지난날에는 제가 잘못하여 매를 맞을 때 아픔을 느꼈었는데 오늘은 어머니의 기력이 쇠약해지셨는지 아픔을 느끼지 못하니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효란 인간에게만 있는 위대한 사상

효도의 ''라는 한자는 상형문자로 아들이 늙은 부모를 업고 있는 형세의 글자라고 한다.

효도란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이며 정성껏 모신다는 뜻으로 효라는 개념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행동양식이기도 하다.

민간전승에는 반포보은(反哺報恩)를 한다는 까마귀를 효의 상징처럼 전하고 있으나 부모보다 덩치가 커진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새를 보고 잘못 알려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듯 효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위대한 행동양식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인간을 옥죄는 사슬이기도 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아버지 상중에 병이 나서 하녀를 시켜 환약(丸藥)을 만들게 했는데, 마침 찾아온 손님이 이 장면을 보고 불효자라 욕했다.

당시에는 부모의 상중에 병이 나거나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은 큰 불효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모친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낙양에 안장했는데, 이는 고인을 고향 땅에 장사지내는 풍습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또 다시 불효자라는 굴레가 씌어지고 결국은 파면을 당했다.

즐거운 사라의 저자 마광수 교수의 효도에라는 글이다.

어머니, 전 효도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낳아주신 은혜' '길러주신 은혜' 이런 이야기를 전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와 전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지요. 그저 무슨 인연으로, 이상한 관계에서 우린 함께 살게 된 거지요. 이건 제가 어머니를 싫어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제 생을 저주하여 당신에게 핑계 대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전 재미있게도, 또 슬프게도 살 수 있어요. 다만 제 스스로의 운명으로 하여, 제 목숨 때문으로 하여 전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어요. 전 당신에게 빚은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어쩌다 얽혀 들어간 사이일 뿐, 한쪽이 한쪽을 얽은 건 아니니까요. , 어머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난 널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이런 말씀일랑 말아주세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모든 동정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애정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차피 우린 참 야릇한 인연으로 만났잖아요?

부모의 품을 떠나면 남이 되는 비정한 동물의 세계가 크로즈업 되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요즘 세대들은 자식은 노후를 대비한 보험도 애완동물도 아닌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라고 항변한다.

종교에서 신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 지탄의 대상이 되듯 부모에 대한 지나친 미화나 자식의 무조건적인 효도를 강요하는 것도 얼마든지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사항입니다. 자연 생태계에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돌보는 게 생태적 현상은 아닌 거예요. 부모도 성인이고 자식도 성인이기 때문에, 각각 자기 개체의 보존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옛 은혜를 생각해서 나이 든 부모를 돌보는 거예요. 그런데 유교에서는 자식을 키우는 것보다 부모를 모시는 것을 더 우위에 두고 효를 중요한 윤리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의무이고,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선택에 속합니다. 선택의 문제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고, 안 해도 죄가 아니라는 얘기예요. 부모가 자식을 버리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고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면 칭찬받을 일,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말씀이다. 시대에 따라 효문화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서글퍼지는 것은 짐승이 아닌 인간이고 싶은 꼰대(? 늙은이)들만의 욕심일까.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