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7)-완적

술을 잘 마시고 예법을 멸시했던 완적(阮籍, 210-263)은 중국 위나라의 문학가이자 사상가로서, 혜강과 더불어 죽림칠현(대나무 숲에 모여 거문고와 술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의 중심 인물이었다. 이 완적 역시 당시 이름 있는 문장가의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인 완우는 서예에 뛰어나고, 음악에 정통했으며, 거문고를 잘 탔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조조(曹操)의 비서실장이자 군사전략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나마 천하의 조조가 여러차례 간청한 끝에 마지못해 응하였다고 하니, 그 위세가 보통은 아니었던 듯 싶다.

과연 조조가 누구인가? 적벽 전투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패배하였으나,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중국 통일을 시도한 영웅이 아닌가?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를 위나라 왕으로 부르게 하고, 황제와 똑같은 권력을 행사하였던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그 조조 군대의 모든 편지와 연락문서,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는 격문(檄文)이 다름아닌 완적의 아버지, 완우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함께 문서를 작성했던 사람이 진림(陣琳)이다.

진림은 본래 원소(袁紹) 장군 밑에서 격문 쓰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상대편인 조조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마땅히 죽여야 함에도 조조는 그의 재주를 아껴 특별히 사면하였고, 이에 따라 완우와 함께 문서 작성 일을 맡은 것이다. 이 진림이 어찌나 문장을 잘 썼든지, 조조는 그 문장으로 두통을 잊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떻든 완우는 진림과 더불어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건안칠자란 조조 및 그의 두 아들 3부자(父子)를 중심으로 모인 문학동호인 7인을 가리킨다. 이들 일곱 문인은 궁중에 자주 드나들면서 조조 부자와 글로 재주를 겨루었던 바, 깨끗하고 신선한 바람을 시()에 불어넣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기질을 이어받아 완적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상이나 기성권력에 반항하는 노래, 원초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노자와 장자의 사상. 억지스런 도덕을 물리치고 자연의 순리에 따를 것을 주장)을 추구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매우 개성적인 인재로서 호방하였고, 타고난 성질이 마치 굴레 벗은 말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즐거움과 노여움을 얼굴에 직접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의 행위는 괴이하고 방탕하여, 하늘과 땅을 방처럼, 집을 저고리처럼 여겨 맨 알몸으로 앉아있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책방에 다가가면, “어찌 나의 바지 덧천(덧놓거나 덧대는 데 쓰는 천)에 들어 왔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당시는 사마씨 집안이 정권을 틀어쥐고 있을 때였다. 1대 사마의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 군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쿠데타를 일으켜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의 아들 사마소는 당시의 황제 조모를 폐위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또 그의 아들 사마염은 낙양을 도읍으로 삼아 진나라를 세운 다음, 천하를 다시 통일하였다.

이처럼 기세등등한 사마씨 정권 하에서 완적은 사마씨의 참모를 지냈다. 하지만 권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무엇보다 완적은 틀에 박힌 형식과 마음에 없는 예법을 멀리 하였다. 그리하여 예절에 얽매인 지식인이 찾아오면 탐탁지 않게 여겨 흰자위를 드러낸 눈으로 대하고, 거문고나 술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반가운 마음에 호의어린 눈으로 대하였다. 그의 이런 태도에서 백안시(白眼視-눈을 위로 치켜뜨며 흘겨보면 눈의 흰자위가 커지는데, 이처럼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못마땅하여 흘겨보는 것)라는 말과 청안시(靑眼視-남을 대할 때 좋은 마음으로 보는 눈)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영광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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