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9)-포이어바흐

유물론 철학자 포이어바흐(1804~1872)는 독일의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 란츠후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열적이고 결단력이 강한 법학자였다. 그는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고고학자 겸 미술비평가, 둘째 아들은 수학교수, 셋째 아들은 형법학 교수, 넷째 아들이 여기에 나오는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이며, 막내아들은 문학과 어학을 전공하였다. 이상의 다섯 아들 외에도 그에게는 세 딸이 더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한 명의 첩을 거느리고도 많은 자식들을 교육시킬 만큼 넉넉한 재산이 있었다.

어린 포이어바흐는 모범생으로서 선생님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학교시절 생활기록부에는 그가 질서를 잘 지키는 데다 매우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을 가졌으며, 대단히 모범적인 품행의 학생이었다.”고 쓰여 있다. 포이어바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밥 먹고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도서관에 가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한 사건과 부딪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안청에 불려간 것이다. 알고 보니, 수학교수였던 둘째 형이 학생운동 건으로 체포되고, 다른 두 형들도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더욱이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던 둘째 형은 34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죽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무죄로 풀려난 포이어바흐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그리고 에어랑겐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25세의 나이에 강사생활을 시작한다.

포이에르바하 역시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들처럼, 처음에는 교수가 되려 했다. 이를 위해 여러 대학에 서류를 제출했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철학교수로는 적당치 않다.”라는 자기 변명을 늘어놓으며, 교수직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다. 그런 다음, 모든 가능한 직업을 다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때 한 여자로 인해 상황이 바뀌게 된다. 성주(城主)이자 도자기 제조업자의 딸과 결혼에 골인한 것이다.

마침내 그는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된다. 그는 장인이 소유한 성의 탑 꼭대기 방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은거생활을 하게 된다. 도자기공장에서 벌어들이는 아내의 수입 외에도 훌륭한 과수원과 정원, 야생동물과 새들이 사는 커다란 숲, 그리고 양어장에 의해 풍족하게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유명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책에 열광하고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는가 하면, 직접 그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그의 저서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점점 무관심해져갔다. 그는 자신을 무능하기 짝이 없는 백발의 노인으로 평가하며, 철학자보다 차라리 나무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생활 역시 궁핍해진다. 수입이 떨어진 도자기 공장은 마침내 파산을 선고받았으며, 성에 있는 주거지마저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도시 근교로 이사한 그는 주변의 소음과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연구를 하지도 못한다. 마침내 자선단체의 기부금 및 친구들의 공개적인 모금운동으로 겨우 생활을 지탱해나갔다. 포이어바흐는 겨우 겨우 연명해가다가 여러 차례 졸도 발작을 일으켰으며, 나중에는 정신마저 혼미해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던 그는 68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물질을 강조했던 철학자가 정작 이 없어 말년을 불행하게 보냈다는 사실, 아이러니가 아닐까?(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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