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신문 편집위원·가족센터장

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풍운아 유자광의 생가터

군남면 용암리 용암마을에는 서얼출신에서 1등공신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 간 풍운아 유자광(柳子光)의 생가터가 있다.

조선시대 중죄인에게 내려졌던 파가저택(破家瀦宅, 집을 허물고 그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것)의 결과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 자연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작은 연못 옆에 근래에 지워진 듯한 허름한 정자와 나무 몇 그루가 생가터임을 알리는 빛바랜 표지판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유자광은 세종 21(1439) 영광 용암마을에서 경주부윤(시장)을 지낸 유규의 아들이자 대사헌을 지낸 유자환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벼슬길이 막힌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그의 가계는 달랐다.

조부 유두명(柳斗明)은 대언(代言, 3)을 지냈으며 아버지 유규는 음서로 입조한 뒤 무과에 급제(세종 8)해 사헌부 장령을 거쳐 형조·호조참의·황해도 관찰사·경주부윤(이상 종2) 등을 역임했을 만큼 명문가였다.

유자광전기

유자광의 유년기를 기록한 야사에는 작자의 성향에 따라 다소 상충되는 이야기들이 전기형식으로 전해진다.

남곤은 [해동야언]의 유자광전에서 어려서부터 행실이 나빠 도박으로 재물을 다투고(중략). 유규는 유자광이 미천한 소생으로 이처럼 광패(狂悖)하므로 여러 차례 매를 때리고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유자광은 감사 유규의 첩이 낳은 아들로 남원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쳤다(중략). 유규는 훗날 그가 크게 성취할 것을 알고 매일 [한서]의 열전 하나씩을 외우게 했다.’라고 서로 상반되게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유자광의 무예를 시험하고 감탄했다는 기사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편에 실려있다.

임금이 유자광(柳子光)의 날래고 용맹함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불러 시험하니, 한 번 뛰어서 섬돌 십수 계단을 거뜬히 뛰어넘고 능히 큰 기둥나무을 잡고서 오르기를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으니(중략)’

몸이 날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대문장가인 신숙주와 외교문서를 겨룰 만큼 문장과 사서에도 뛰어났던 유자광을 세조는 몹시 총애했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유자광에게 6조의 낭관(5)직을 제수했으나 지평 정효항 등이 나서 서얼인 유자광의 낭관 임명이 불가함을 수차에 걸쳐 아뢰자 노모의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한다.

이 때부터 유자광은 신분에 대한 극도의 반감으로 와신상담 출세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관직의 최고 품계인 대광(大匡 1)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유자광은 그를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실의 종친(宗親)이던 남이(南怡)가 강순(康純) 등과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여 이른바 남이의 옥()’을 주도한 공로로 정난익대공신(定難翊戴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으며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고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으나 험난한 벼슬살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 세조에서 중종대에 이르기 까지 6대에 걸쳐 각종 요직을 거치며 수많은 사건에 연류되거나 중심인물이 되어갔다.

결국 중종반정의 공신이었으면서도 신하들의 반대상소로 유배길에 올라 1512(중종 7)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유방역시도 세상을 한탄하다 목매어 목숨을 끊었다.

중종은 유자광이 죽은 뒤에 그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키고 예장(禮葬)할 것을 명령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08(순종 1)에야 죄명을 벗고 원래의 관작(官爵)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서얼(庶孼)과 서민(庶民)의 차이는

유자광은 이미 당대에 간신이자 악인으로 규정되었으며 그 평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가 여러 정치적 고변(남이의 옥, 무오사화 등)을 통해 사건을 확대시키거나 모함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민감한 정치적 국면에 적극 개입한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서자라는 신분의 낙인에 대한 극도의 반감이었을 것이다.

그가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원통하고 원통하다고 했던 데서도 그의 절박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학연이나 지연등을 고리로 한 순혈주의와 부()를 기반으로 하는 서열의 계층화가 적지 않게 잔존해 있는 게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서자(庶子)로 산다는 것과 현대에 서민(庶民)으로 산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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