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0)-비트겐스타인

비트겐스타인(1889-1951)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부유한 철강 재벌의 5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당시 부잣집 자녀들이 흔히 그랬듯이, 열네 살 때까지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농촌 영지와 도시의 별장을 돌아가며 생활했다. 비트겐스타인의 큰형 한스의 음악적 재질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비교될 정도였고, 넷째 형 파울은 1차 세계대전 중 오른팔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비트겐스타인의 음악적 재능도 보통을 넘었지만, 오히려 음악보다는 기술 쪽 재능이 더 뛰어났다. 이미 소년 시절에 최신형 재봉틀을 만들기도 했던 그는 베를린 공과대학을 거쳐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에서 항공 공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결국 철학에로 돌아왔다.

비트겐스타인은 제 1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여 포병장교로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훈장을 받기도 하였으나 휴전이 성립된 지 이틀 후, 이탈리아 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포로수용소에서 메모했던 생각들을 정리하여논리철학논고를 펴냈는데, 이 책은 20세기 철학의 최고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책을 읽고 마음이 크게 흔들린 비트겐스타인은 그날부터 검소한 생활을 꾸려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형제자매들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만다. 그것도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비트겐스타인은 남쪽에 있는 시골학교로 가서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는 환영받는 교사가 못되었다. 동료들과의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이 못되어서 몇 년 후 교사직을 포기하고 만다. 그 후 수도원의 보조 정원사가 되는데, 이곳에서의 잠자리는 연장을 보관하는 헛간 수준이었다.

한편, 영국의 철학계는 멀리 떨어져있는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그는논고로 박사학위를 받고, 특별연구원의 자격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검소한 생활방식을 바꾸지는 않았다. 비트겐스타인의 방에는 안락의자도, 독서용 전등도 없었다. 사방의 벽은 그림 한 점도 없이 썰렁했다. 그는 양복을 입는다거나 넥타이를 맨다거나 또 모자를 쓴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식사도 아주 간단히 하였는데, 고집스럽게 빵과 치즈만을 먹었다.

그는 노르웨이의 바닷가 오두막에서 약 1년 동안 조용히 집필에 몰두하다가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교수직에 취임하기도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만다. 이에 비트겐스타인은 영국군에 지원하여 런던의 한 병원에서 환자를 수송하는 요원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의학연구소의 실험실 조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 돌아온 그는 연구에 전념하다가 다시 교수직에서 물러난다.

평생 가난한 독신으로 지낸 비트겐스타인은 말년에도 아일랜드의 한적한 농장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더블린(아일랜드의 수도)의 한 호텔에서 살았다. 이 무렵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그는 끝내 불치의 암 환자가 되어 동료 철학자와 제자들, 그리고 고향 가족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삶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1951, 62세의 나이로 주치의사의 집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나는 아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시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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