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3)-정약용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 목사(牧使-군현의 수령)를 지낸 아버지 정제권과 둘째 부인인 해남 윤씨와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첫 부인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서 큰아들 정약현을 낳았고, 윤선도(오우가,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시인)5대 손녀인 윤씨와의 사이에서 정약전(흑산도 유배중 집필한자산어보로 널리 알려짐), 정약종(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회장. 순교당함), 정약용 3형제와 딸 하나를 낳았다.

정약용의 아버지는 중앙 관직에 자리 잡지 못한 채,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지방관리로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어린 정약용에게는 오히려 약이 되었는데, 백성들을 직접 만나고 돌보아야 했던 지방관리의 모습을 통해 백성들의 가난한 삶과 세상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암행어사로 경기지역을 순회하고 지은 시 굶주리는 백성이 있는데, 그 몇 구절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야윈 목은 고니(오릿과의 물새)처럼 구부러지고, 병든 살은 닭 껍데기처럼 주름졌네. 팔다리는 그럭저럭 놀리지만, 마음대로 걷지는 못한다네. 고을 원님이 어진 정치를 하고 사재(私財-개인 재산)로 백성 구휼한다기에 관아 문으로 줄지어 가 끓인 죽 우러르며 앞으로 나서네. 개돼지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것을 사람이 엿처럼 달게 먹는구나.”

정약용의 나이 34세 되던 해에 쓴 이 시에는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다산은 여느 선비들처럼 태평세월을 노래하거나 단순히 음풍농월(吟風弄月-‘바람을 노래하고 달을 가지고 희롱한다는 뜻. ‘풍월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옴)하지만은 않았다. 현실을 똑바로 보면서 부조리한 정치에 의한 백성들의 고통을 시로 그려냈다.

정약용은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로서 순교 당함), 학문적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실학파의 대가)을 만났다. 정약용은 이들을 통해 실학의 대표자 성호 이익(李瀷)의 학문을 접하면서 사상의 토대를 다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였는가? 그는 본래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다. 하지만 신해박해(정조 15년에 신주를 불사른 두 사람을 사형시킴) 당시 조상의 제사를 허락하지 않는 교황의 지시가 내려지자, 대부분의 양반 신자들과 함께 배교(背敎-믿던 종교를 배반함)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신유박해(섭정 정순대비에 의해 천주교도들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명이 유배됨) 때에는 권철신, 황사영 등 다른 교우를 고발했으며, 나아가 천주교 신자를 붙잡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등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고 한다. 이에 매부 이승훈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분노했고, 자신이 정약용에게 직접 세례를 주었노라며 앞장서서 고발(?)할 정도였다.

그러나 샤를르 달레 신부의조선천주교회사에서는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이 배교(背敎) 행위에 대해 깊이 참회하였고, 수시로 몸에 고통을 가하여 죄를 뉘우쳤으며, 죽기 전에는 마침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신부에게 병자성사(병자나 죽을 위험에 있는 환자가 받는 성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설령 그랬다 할지언정, ‘배교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지만.(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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