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1)-이황

1천원짜리 지폐에 초상화로 등장하는 인물, 퇴계 이황은 1501년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에서 아버지 이식과 부인 의성 김씨(21) 춘천 박씨(5)7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인 이정은 경북 선산부사(부사는 3품 문관인 목사와 흡사)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양과 아버지 이식은 진사(진사시험에 합격한 자로서, 지역에서는 유지 역할을 함)였다. 비록 고관대작을 지낸 명문은 아니지만, 그의 집안도 상당한 양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이식이 마흔 살로 진사시험에 합격한 해, 어머니인 춘천 박씨는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솟을대문을 성림문(聖臨門, 성인이 태어난 곳)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깊은 학문과 경륜을 가졌으나 청렴결백하여 재물을 쌓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가정형편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가장을 잃었을 때 어머니 박씨 입장에서는 71녀 가운데 큰아들만 출가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홀로 남은 자식들을 보살펴야 했다. 농사와 양잠(누에 키우는 일)에 더욱 힘쓰는 가운데 자라나는 아들들을 먼 데나 가까운 곳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때 박씨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곤 했다. “글이나 외고 짓는 것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동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과부의 자식들에 대해 가정교육이 부족하여 버릇이 없다고 비난하는 법이니, 너희들은 남보다 백 배 이상 노력해서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긴 이황은 한창 재롱을 부릴 나이인 여섯 살에 이웃집 노인으로부터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다.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다음, 이웃집 울타리 밖에서 어제 배운 바를 마음속으로 여러 번 외워본 후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 앞에 나가면 공손하게 절을 하고, 엎드려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퇴계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물려오는 어느 정도의 재산과 어머니의 헌신으로 그럭저럭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열두 살이 되자 형 이해(李瀣, 학자. 을사사화로 목숨을 읽음)와 함께 작은아버지인 이우(李堣, 정국공신 4, 우부승지. 진주목사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려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음)로부터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는동국사략(단군 때부터 고려 말기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을 편찬한 사람으로, 비록 병이 들었을지라도 책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문장과 시에 능했는데,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돌봐 주었다.

이 무렵 이황은 아무리 주변이 시끄러워도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이황은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책을 읽은 뒤에는 반드시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작은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작은아버지 이우는 자신의 자식보다 형의 아들들이 뛰어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형에게는 이 아이들이 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

이황의 공부 방법은 반복학습이었다. 책을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깊은 사색을 하였다. 같은 책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읽는 바람에 책이 너덜너덜해지기까지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황은 주자 이후 성리학의 제1인자’, ‘동방의 성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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