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정치의 기본은 믿음()에서 나온다. 국민의 믿음을 잃은 정치인은 설 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역으로, 믿음을 가장 빠른 속도로 소멸시키는 것은 거짓이다. 거짓말 세 번이면 믿음을 잃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약속을 세 번 이상 어기는 사람과는 정을 끊는 신념을 지켜오고 있다. 약속은 믿음이고 믿음은 인성이기에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방법은 의외로 효과가 있다. 삶에 가장 영향을 주는 인과 연을 힘들이지 않고 정리할 수 있다. 사람 사이의 교류란 사실 신뢰를 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침전물이 되어 흉하게 가라 앉아 있는 것은 계산적 관계뿐이다. 신뢰 없는 사귐은 비즈니스이다. 더욱이 국운을 좌우하는 중앙 정치에서 무너진 신뢰는 국민 전체를 불안으로 몰아간다. 연일 쏟아지는 대통령실의 거짓말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이유이다. 거짓말 하나를 감추기 위해서 일곱 개의 거짓말이 따른다는 유럽의 속담이 있다. 이런 거짓말은 연관성이라도 갖지만, 현재 정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짓말은 그나마 서로 연관성도 없다. 각인각색의 창작 거짓이 나라 안통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들의 거짓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의 욕망을 위한 거짓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의 거짓은 더욱 질이 좋지 않다.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선의의 거짓도 있지만, 이들의 거짓말은 그야말로 악의적이다. 스스로 양심을 내려놓은, 거짓임을 인지한 상태의 행위는 이미 인성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진실을 자기 생각 범위로 왜곡시켜버리는 능력은 신뢰를 벗어난 악()의 영역이다. 이들이 신봉하는 악의 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법치(法治)’이다. 법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만인 평등을 기조로 하는 법대로가 아닌, 상대성에 기인하는 법으로이다. 과거 한비자(韓非子)는 법가로 진시황의 관심을 받았고 그로 인해 죽지만 진의 통일 저변에는 분명히 한비자의 법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른바 한비자의 법치이다. 당시 제자백가의 주창 현문은 유가의 인의정명(仁義正名), 도가의 무위무명(無爲無名), 묵가의 삼표논리(三表論理), 음양가의 기수논리(氣數論理), 명가의 명실상부(名實相符), 법가의 형명참동(刑名參同) 등이 있었다. 하지만 백가의 목적은 평천하에 있었지 진리의 탐구는 아니었다. 세상을 통일하여 다스리는 방법론으로 귀결되는 부국강병론은 전쟁으로 흐르는 도도한 강물을 만들었고 이 강물은 백성의 피로 채워졌다. 쓸모없는 논쟁으로 남은 죽은 학문이 된 셈이다. 그럴듯한 논리는 제후를 위해 지어졌고 법치는 백성의 수탈을 위해 존재했다. 먼 과거 2250년 전의 백가론이 현 정치판에 남아 있음을 경이롭게 바라보지만, 그보다 긴 세월을 변하지 않는 종교를 보면 한편 수긍이 된다. 정치와 종교는 형태만 달리할 뿐 원리는 비슷하다. 특히 추종의 가스라이팅 과정이 너무 흡사하다. 사람에겐 주어진 역량만큼의 역할이 있다. 작은 식당에서도 서빙 직원이 갑자기 찬모 자리에 앉으면 엉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한국의 정치판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특히 선출직 고위 정치인에게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사업가가 시장 군수가 되려면 일정 기간 트레이닝을 거쳐야 하지만 거의 무시 된다. 작은 지방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역량과 역할 그리고 전문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시민의 선택인 투표에만 의존하기엔 뭔가 미진하다. 요즘 우리 대통령을 보면서 국민투표의 한계를 통감하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물가는 고공행진인데 나라는 온통 대통령실의 거짓말 진위로 열병을 앓고 있다. 온 국민이 알아보는 얼굴도 가르마가 다르다는 이유로 검찰만 알아보지 못하고, 온 국민이 알아듣는 녹음도 대통령실과 여당만 알아듣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했다. 거짓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무신뢰는 국가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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