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불상 전한 ‘마라난타’ 찾아 나선 순례길

최 종 걸
최 종 걸

카니시카 대탑의 전설을 뒤로하고 순례단 일행은 페샤와르를 지나 밀란다 패스 고갯길을 넘어 스와트로 향했다. 그 길은 험했다. 좌우 협곡 험준한 산자락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대영제국 시절 장교로 근무했던 초소가 있었다.

스와트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하고 석가모니 부처님 화신이라고 추앙받는 파드마삼바바 고향이기도 하다. 페샤와르를 떠나 스와트 가는 길은 험준한 만큼 우리 순례단 일행은 긴장감을 멈출 수 없었다. 이를 의식한 듯 파키스탄 정부와 현지 간다라문화협회는 군 장갑차와 경찰차로 경호에 나섰다. 스와트는 빈 라덴 사살 지역과 인근인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티베트에서 부처님이 환생했다고 추앙받는 파드마삼바바 고향...스와트

스와트는 중국에선 오장나국, 신라 혜초스님은 오장국으로 불렀다. 스와트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에 더해 아름다운 정원이라고도 불린다.

당나라 시절 중국 현장 스님도 스와트를 순례기에서 수목이 무성하고 꽃과 과일이 풍부한 곳이라고 했다. 당시 절과 불탑이 1,400개가 있었고, 스님도 18,000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신라 혜초 스님은 이 나라 왕은 삼보(불 법 승)를 매우 공경하고 절과 스님이 많고, 스님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많다고 했다.

스와트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의 고향이다. 마치 마라난타 스님이 영광 법성포를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한 기연과 같다. 파드마삼바바는 747년 라다크와 티베트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티베트에서는 파드마삼바바가 부처님이 환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간다라 지역 출신 중 한 명인 마라난타 스님이 384년 멀고 먼 순례길을 따라 백제에 불교를 전했다면, 파드마삼바바 스님은 747년 전후로 티베트에 수행자의 참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로 온 것보다 400여년후에 티베트에 가서 정신적 스승 역할을 한 것이다.

파드마삼바바가 집필한 티베트 사자의 서1200년 전 티베트 산속에서 집필한 100여 권 중의 하나로, 집필 후 히말라야 곳곳 동굴 속에 감추어 둔 책이다. 그의 제자들이 100권 중 65권의 책들을 찾았고, 그중의 한 권이 릭진 카르마 링파가 찾은 바로 그 비서 티베트 사자의 서이다. 릭진 스님이 찾았을 당시의 제목은 바르도 퇴돌이다. ‘바르도는 둘 사이, 낮과 밤의 사이,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사이, 죽은 사람이 환생하기 전까지 49일을 머무르는 세계를 의미한다. ‘퇴돌듣는 것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라고 한다. 죽은 자, 혹은 죽어가는 자에게 <사자의 서>를 읽어줌으로써 영원의 자유(행복한 환생)를 얻게 해주는 글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티베트 사자의 서로 출간된 이 책은 죽음과 환생의 단계를 풀어냄으로써 선풍적인 인기를 끈 바 있다.

책의 주요 내용은 우리 불가에서 죽은자(사자 死者)를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바라는 49재와 같다. 스와트의 산에는 현장 스님이 언급한 것처럼 많은 절과 탑이 산재해 있고,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았다. 스와트 지역의 주요 유적발굴 작업과 연구는 이탈리아 고고학팀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스와트엔 부처님 입멸 후 8개국으로 사리 분배를 할 때 이곳의 왕이 부처님 사리를 분배받아 모신 싱가다르 사리탑이 있다. 이 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당나라 시절 현장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여래)이 입멸하려고 할 때 제자들에게 내가 열반에 들 때 우디야나국의 왕에게도 사리를 나눠 주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하필 우디야나국 왕이 부처님 열반후 조문을 늦게 왔다. 당시에 우디야나국은 조금 먼 지역인 산골이었다. 당시 변방의 왕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어 늦게 온 우디야나국 왕에게는 부처님 사리를 나누는 것을 미뤘다. 그러자 천인들이 부처님의 유언을 상기시켰다고 한다. 하여 같은 양의 사리를 분배받은 우디냐나국 왕은 돌아와 스와트에 봉안하고 탑을 세웠다. 이 자리에 세우게 된 까닭은 사리를 싣고 가던 하얀 코끼리가 이곳에 주저앉아 죽어 그대로 돌이 되었다. 그래서 그 옆에 탑을 세웠는데 탑 주변 강가에 코끼리 형상을 한 큰 돌이 있다.

불교사에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 불사 그리고 사리탑을 조성할 때 구전으로 들려오던 이적이 어쩜 이리 같을 수가 있을까 하는 신묘한 이야기다. 충청도 갑사나 평택 심복사에도 중창 불사 시에 스님 현몽 속에 소가 진짜 나타나 목재와 불상을 옮겨다 놓고 불사를 거들었다는 우공탑 이야기와 흡사하다. 스와트에 있는 싱가다르 사리탑(스투파) 마을 뒷산의 형상이 코끼리가 누워 있는 것 같았다.

현장 스님 기록에서 보는 것과 같이 본래 스와트에는 수많은 절과 탑 그리고 스님들이 있었다는 기록대로 발굴된 절과 탑이 많았다. 그리고 부처님의 발자국과 가사를 말린 흔적이 있는 바위도 있었다.

 

부처님 사리 분배한 8곳 중 한 곳인 싱가다르 사리탑

싱가다르 사리탑(스투파)은 아주 특이했다. 기단은 방형을 이루고 있고, 몸통은 원통형, 정상은 돔 모양이었다. 파키스탄 고대사에 까막눈이었던 인근 마을 주민들은 기단을 쌓은 많은 돌을 자기 집 돌담을 쌓기 위해 빼 가서 원형 탑 곳곳이 이빨 빠진 것처럼 보였다. 원통형 탑신은 두 개의 띠로 둘러쳐 있었고, 윗부분 띠는 둘레가 12, 탑 높이는 27, 정상 부분은 돔이라고 한다. 다행히 유네스코에서 다시 마을 주민들 돌담을 사들여 싱가다르 사리탑 원형복원을 하고 있었다. 순례단 일행은 탑돌이로 예불을 겸한 후 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그 호텔은 스와트 지방 장관 영빈관을 호텔로 만든 곳이었다. 잘 꾸며진 정원 곳곳에 경비가 삼엄했다. 이 지역 사단의 군사령관과 행정관, 지방 경찰 책임자까지 나서 순례단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곳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거점인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안전을 의식해서였는지 저녁 만찬은 지역 사령관이 주최하면서 다음 날 있을 성지 순례에도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말을 특별히 강조했다. 만찬이 끝나고 다음 날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밤중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밤하늘을 보려는 순간 무장한 군인들이 순례단 숙소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그 모습에서 종교는 다르지만, 자국의 고대 유적들에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준 순례단에 대한 각별한 배려임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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