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황당한 참사가 다시 터졌다.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지만 이번 이태원 참사 역시 뉴스를 볼 용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참혹하다. 아이를 키워본 부모의 입장이라면 이러한 뉴스를 접하는 자체가 너무 힘들고 안타까울 것이다. 그래도 관심을 놓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국민의 관심이 책임자에겐 감시의 채찍이기 때문이다.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누군가의 책임을 묻고 잘못을 바로잡아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옳으며, 그 최종 책임은 항상 정부가 졌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하는 게 정부의 사과였고 정점에 있는 대통령은 그 당사자가 되었다. 우연과 필연을 떠나 국가적 대사건은 일단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직 이를 부정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정부는 없었다. 하지만 현 정부의 행동은 초기 대처부터 달랐다. 축제의 주체를 따졌고 책임 소재를 거론했다. 사과 이전에 법을 내세운 것이다. 판사 출신의 행안위 장관이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헌법적 해석을 무시한 것이니 지위에 연연한 양심의 매도이다. 이번 참사를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정부는 책임을 벗을 수 없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책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고 처음부터 거짓말로 사안을 호도하고 관심 점을 왜곡하고 있다. 이들의 비뚤어진 양심의 저변에는 분명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온통 법조인으로 짜인 정부의 기본 강령은 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나만의 생각일까. 법치와 법대로라는 단어가 내포한 무서운 이중성을 함께 아우르고 구현해 낼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부류가 장악하고 다스리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면 억지일까. ‘모든 범죄는 기소로 말한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완벽한 증거를 수반한 수사도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면 판사는 재판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최근에도 여러 건 접했지만 의문과 때로는 분노로 삭일뿐 아무런 대처 방법이 없다. 이는 법대로 가는 길의 절대적 권력이다. 검찰의 절대적 권력인 법대로는 기소권을 장악하고, 약자 부류엔 법치라는 무서운 힘을 행사한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고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라던 노회찬 전 의원의 말이 회자하였던 게 우연은 아니다. 법이란 지극히 사람을 가린다. 그리고 대상에 따라 적용이 현저히 달라진다. ()을 한자로 풀면 물이 흘러간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 삼보로 생각하는 불··승의 법과 같은 자를 사용하는 법은 물이 흘러가듯 진리와 이치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법치에서의 법이 바로 이러한 원리를 품고 있다. 중국은 물론 우리 선조들이 즐겨 그리고 감상했던 그림에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가 있다. 학식 높은 선비가 물을 본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물은 도가 되고 진리가 된다. 그래서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의 법이 된다. 노자 역시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한다. 최상의 선은 바로 물이고 이는 자연의 법이다. 그래서 후대 우리는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꼭 지켜야 할 덕목을 법으로 정했다. 이는 사회의 약속이 되었고 치국의 바탕이 되었다. 한비자의 법치를 통해 시황은 진을 통일했고 법의 기본인 신뢰의 상실로 인해 순식간에 다시 자신의 목숨과 나라를 잃었다. 법을 치국의 약속으로 사용하지 않고 권력욕의 도구로 사용하는 순간 상선은 하책이 되고 불신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법의 권력화로 인해 급속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는 물 흐르듯 매끄러워야 하는 법의 원 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기 싫으면 책임을 조건으로 하는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책임 회피의 근거를 법대로에서 찾으면 법의 기본 정신은 물론 정치까지 더불어 무너진다. 미국 대표적 보수 언론인 워싱턴포스트지는 세계에서 가장 미움받는 리더(the World’s Most-Disliked Leader) 가늠하는 시험대라는 보도를 했다. 대한민국은 법조인의 법대로에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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