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불상 전한 ‘마라난타’ 찾아 나선 순례길

간다라 후손들 마라난타 스님 찾아 영광 답례에 나서

최종걸/전 연합뉴스 기자
최종걸/전 연합뉴스 기자

순례단이 간다라 불교문화 유적지를 순례한 이후 파키스탄에서도 마라난타 스님이 가셨던 영광 법성포와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는 불갑사 방한에 나섰다. 방한단은 고대 간다라지역의 수도였던 페샤와르, 스와트 ,탁실라를 아우르는 지역인 카이버박툰카와주 관광부장관과 차관, 파키스탄 내무부(행정안전부) 담당 과장, 관광공사 전 사장, 간다라문화예술협회 이사, 국립예술대 건축과 교수 등 7명이었다. 이들 일행의 방한을 추진한 한국 측은 천태종(당시 총무원장 전운덕 대종사)과 대한불교총연합회, 영광군이었다. 이들은 45일의 방한 일정으로 경주 불국사, 단양 구인사 등을 거쳐 영광 불갑사에서 1박을 하고 법성포 간다라박물관 등을 찾았다.

이들의 영광 방문 일정으로 당시 정기호 영광군수님의 환영만찬이 장시간 이어진 이후 영광 불갑사로 이동하는 동안 필자를 부르더니 크로와상 빵과 블랙티를 아침에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정기호 영광군수님의 환영 만찬때도 급조한 육식을 별도로 추가한 터라 준비해보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아침은 크로와상 빵과 블랙티였기 때문이다. 가는 절마다 내놓는 화려한 채식 식단이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염려마시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이들은 불갑사 일정 현장 통역을 맡는 필자에게 어제 밤은 한국 일정중 가장 깊은 숙면을 취했다고 말하면서 아마도 본인들 선조인 마라난타 스님이 후손들이 자기가 세운 사찰에 왔다고 깊은 잠을 자게 한 것 같다라고 의미를 되새겼다. 불갑사에서도 정성을 다해 아침상을 준비했지만 간밤 부탁한 크로와상 빵과 블랙티는 오전 9시가 돼서야 준비가 가능하다고 했다. 영광 읍내에 계시는 한승주 선배님에게 간밤에 부탁한 터라 9시전까지는 아침을 늦췄다. 한 선배님이 읍내 파리바케트에 크로와상 빵과 블랙티를 한 아름 사오셨다. 불갑사에서 준비한 아침상과 함께 크로와상 빵과 블랙티도 추가했다. 이들은 빵과 블랙티를 한국와서 처음 맛본다면서 오늘이 본인들 생일이라고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갑사에서 깊은 숙면과 함께 본인들이 먹고 싶어하는 아침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순례길에서도 입맛에 맞은 음식과 잠이야 말로 더 생생하게 현장을 이해하고 하나라도 더 그 의미를 되새기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공감한다고 즐거운 아침을 함께 했다.

 

마라난타 스님의 불법 전래 흔적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 사리탑과 법성포

아침 공양을 마치고 불갑사 대웅전을 설명하면서 한국 사찰 중 유일하게 대웅전 용마루에 스투파(사리탑)가 있다고 소개했다. 마라난타 스님이 가지고 온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대웅전 용마루에 스투파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마라난타 스님이 지난 384년 백제 침류왕 왕사로 초빙돼 첫 번째로 조성한 절이라 해서 불갑사(佛甲寺)라고도 했다. 이어 마라난타 스님은 10명의 백제 사람을 제자로 삼았고, 이들 스님들의 후학들이 일본에 불교를 전파시켰다는 설명을 이어갔다. 불갑사를 뒤로 하고 마라난타 스님이 오신 것을 기념하는 법성포 소재 간다라박물관으로 안내했다. 법성포(法聖浦)는 마라난타 스님이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 온 성인(聖人)이 온 포구라는 뜻을 지닌 지명이라고 설명했더니 이들의 얼굴에는 고마움과 감동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어 도착한 간다라박물관 경내에는 간다라지역 양식 그대로 간다라 불교를 개화시킨 아소카 대왕의 석주, 탁트히바히 절 명상센터를 축소한 석굴, 그리고 박물관과 마라난타사를 차례로 소개했다. 박물관 입구에는 마라난타 스님의 입상이 후손들의 답례길을 맞이했다. 박물관내에는 마라난타 스님이 파키스탄 간다라로부터 순례길에 나서 당시 중국 동진(지금의 절강성)을 거쳐 해류를 따라 영광 법성포에 이르는 이억만 리 길의 자취와 조각상이 전시돼 있었다. 수백억 원이 투입된 백제불교 첫 도래지 기념관이라는 소개에 이들 답례단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자신의 선조를 성인으로 받들고, 이처럼 성스럽게 기념 할 줄을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라난타 스님 고향에는 이곳 출신이 동양의 먼 나라에 불법을 전파하러 간 성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지만 이처럼 생생하게 예경 할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였다. 그곳 간다라는 기원전과 기원후 1000년 동안 세계 문화사에서 가장 찬란한 동서양 문화문명이 융합된 문화문명국가였지만 지금은 파괴된 옛 문화를 어렵게 복원하고 있는 중에 뜻하지 않는 성지를 목격한 것이다. 박물관 조성이 여전히 진행중인 사면 불상을 직접 현장에서 둘러보면서 유물 기증 의사로 밝혔다. 그만큼 이들의 감동은 컸다.

고대 종교관중 특이했던 건 불상불가론(佛像不可論)이다. 아함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있을 때 임종을 앞둔 발칼리라는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달려오자 스님은 일어나 예배를 드리려고 했고 부처님은 손을 잡아 자리에 누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썩어질 몸을 보고 절해서 무엇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리라고 하였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법문이었다. 그곳에서 불교가 발생하기 전 베다 종교에는 신상을 만들어 그곳에 예배하는 것을 배척했다고 한다. 베다 경전인 <야주르베다>를 보면 신의 이미지는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불타관과 고대 간다라 사람들이 가졌던 신앙관에 의해 신상(神像)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간다라에서 처음 불상이 출현하게된 것이다. 불상을 처음 조성한 쿠샨왕조 카니시카 왕은 원래 조로아스터교 신도였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와 문화가 다른 이민족과 함께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그들 신들의 초상을 대신해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 상을 만들었고, 부처님의 전생과 일대기를 불탑과 사원으로 장엄해서 불교의 진리를 널리 전파했다는 설이다. 카니시카 왕은 이를 통해 정신적으로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 체제를 굳건히 하면서 왕의 신격화 정책을 동시에 편 것으로 보고 있다.

 

불상(佛像)은 신의 모습을 사람의 영역으로 환생시킨 상징

카니시카 왕은 바로 그곳 간다라에서 불상(佛像)을 통해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카니시카 왕이 불교로 개종 전 믿었던 조로아스터교는 사람이 죽은 후 극락과 지옥에 가는 문제를 심판할 때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광명세계로 갈 수 있는 희망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사후세계에 대해 매우 불안해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모시는 빛의 신은 불교와 만나 점차 영원한 광명의 아미타불이 되었고, 모든 사람을 구하는 페르시아 사막의 물의 여신 아나히타는 자비심 넘치는 관세음보살이 되었다. 한편 태양신 마트라는 세지보살이 되어 점차 삼위 일체적 사고로 불교의 아미타 삼존불로 등장한다. 또 중국에서는 로마에서 포도주를 수입하여 마셨는데 이 포도주를 담았던 빈 원통형 질기에 약초를 담아 인도와 페르시아에 역수출하여 팔았다. 이것을 중앙 아시아인들은 동방에 병을 고치는 부처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동방의 약사여래가 나타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같은 기원이 서린 불상과 불법 등 성물(聖物)을 백제에 전한 마라난타 스님은 백제 그리고 훗날 일본의 정신개벽(精神開闢)을 연 분이었다. 중국 불교도 간다라로부터 유입됐고 한국 불교의 뿌리도 간다라는 점에서 특히, 삼국시대 유입된 불교 중 백제시대 때 불교가 간다라 출신 스님이 침류왕 왕사로 직접 전래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영광 불갑사와 법성포 간다라박물관은 한국의 삼국시대 정신개벽을 연 마라난타 스님에 대한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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