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관심 속에서 치러진 월드컵이 한국의 16강 탈락과 함께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특히 새벽 네 시에 치러진 브라질과의 마지막 경기는 많은 직장인에게 더 큰 월요병을 선물했다. 그래도 원정 경기 두 번째로 진입한 16강이기에 그만큼 값진 결과였고, 마지막 상대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브라질이었다는 데에서 서운함을 에둘러 자위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 게 바로 우리라는 공동체 개념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오면 처음에 느끼는 문화가 청결과 질서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도덕성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들이 노자의 도덕을 알 리가 없겠지만 자신들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인만의 행동에서 이를 느낀다는 것이다. 카페에서 컴퓨터를 놓고 한참을 자리를 비우는 배짱과 터미널에서 여행용 가방만 세워두어도 사람을 대신하는 모습을 이들이 이해하긴 힘들다. 은행에서 돈다발이 뒹굴어도 손대는 사람이 없고 프런트에 지갑이 떨어져 있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니 참 대단한 국민성이다. 우리만의 국뽕으로 치부하기엔 이러한 민족성이 너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이다. 물론 극소수의 그렇지 않은 시민도 존재하겠지만 전체적인 조류를 바꾸기엔 미약하다. 이러한 우리의 청결과 도덕 문화에 가장 영향을 준 게 무엇일까. ‘우리라는 공동체 성격을 띤 고유의 정서가 역할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라는 개인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의 의미를 지닌 지칭은 어쩌면 민족 고유의 정서일 것이다. 국가도 우리나라이고 집도 우리 집이다. 아내를 남에게 소개할 때도 우리 아내가 된다. 심지어 자녀를 인사시키면서 우리 아들 혹은 딸이라고 한다. 이러한 우리사용법은 이따금 화제가 되고 웃음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라는 단어는 포기하지 않는다. 단일민족이라는 스스로 정한 테두리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이러한 학설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고 보면 삶의 관습이 주원인이지 않나 싶다. 원래 우리를 강조하는 공동체는 고대국가 이전의 마을 공동체에서 유래 되었고, 이후의 공동체는 주로 종교의 시발점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렇게 출발했고, 토속 종교인 원불교 역시 백수 길용리 정관평에서 공동체 생활로 첫발을 내디뎠다. 다른 종교 역시 시발점을 보면 대동소이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 사이를 가장 끈끈하게 이어주는 단어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요즘 화물노조의 파업으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심지어 귀족노조의 파업이라는 가슴 아픈 기사까지 등장하고 있다. 정부는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위헌적 불법 파업에 대한 법치를 강하게 내비쳤다. 헌법에서 보장한 노동삼권을 정면으로 부정한 셈이다. 파업은 불편을 담보로 하는 노동자의 마지막 수단이다. 그게 위헌이라면 노동권은 같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이번 사안은 심각한 것이고, 국제노동기구(ILO)가 직접 개입을 했다. “민주노총이 제기한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 당국에 즉시 개입한다.”라는 내용이다. 정부가 결정한 업무개시 명령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자영업자인 그들에게 업무를 다시 개시하지 않으면 감옥에 보내겠다는 명령이다. 여기에 자신이 그렇게 강조했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문제는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국민이 바라보는 정서이다. 화물 노동자의 일탈이 국민 전체에게 경제적 악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더 많다는 게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결과 바닥을 헤매던 대통령의 지지율은 올랐다. 국가라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불법 노조를 강경하게 제압하는 모습이 주는 효과이다. 옳고 그름은 뒷선이고 우리라는 공동체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에게 밈으로 존재하는 도덕과 충효 사상이 역작용을 일으킨 현상이다. 가족을 위해선 자신을 희생하고, 국가를 위해선 가족도 버려야 하는 국가주의 사상이 우리라는 개념을 만들고, 시비의 판단은 우리라는 공개념의 미명에 묻혀버렸다. 어깨동무의 우리는 소중하지만, 왜곡된 다수의 공익으로 눈가림한 우리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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