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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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갓집 개가 된 흥선군

파락호(破落戶)란 재산이나 세력이 있던 가문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도박이나 주색 등으로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된 난봉꾼을 이르는 말이다.

파락호로 놀림을 당하던 흥선군(고종의 생부로 훗날 국태공에 오름)이 하루는 당시 막강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김씨 집안에서 큰 잔치를 벌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아침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꾀죄죄한 몰골로 집안에 들어선 흥선군은 술상을 내오라며 큰소리를 치다가 잔치마당에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안동김씨들이 저러니 상갓집 개 소리나 듣는 게 아니냐.’고 비웃으며 뼈에 붙은 고깃덩이를 던져주자 흥선군은 개의치 않고 뼈다귀뿐 아니라 잔치상으로 달려들어 다른 사람이 남긴 음식까지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사실 흥선군이 상갓집 개처럼 행동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는 세도가문인 안동김씨의 위세가 얼마나 막강했던지 똑똑한 왕족은 물론 왕조차도 그들의 눈 밖에 나면 목숨조차 부지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세도정치를 막아내고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흥선군이 안동김씨들의 손아귀에서 죽지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시정잡배가 되어 파락호로 낙인찍힘으로써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길밖에 없었다.

세간의 온갖 비웃음은 물론 안동김씨의 바지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 치욕까지 참아가며 때를 기다리던 흥선군에게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안동김씨의 위세에 눌려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했던 철종이 여색에 빠져살다가 재위 10년을 넘기면서부터는 병치레가 잦더니 후사없이 붕어하고 말았다.

흥선군은 재빨리 왕실의 큰 어른인 신정왕후 조대비를 찾아가 자신의 둘째 아들(훗날 고종)을 왕으로 만들어 주면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허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승낙을 받는다.

안동김씨들은 흥선군의 아들이 왕통을 이어받으면 흥선군이 국태공이 되어 권력의 누수현상이 생길 것이라며 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으나 조대비의 뜻이 워낙 강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그동안 흥선군에게 갖은 수모를 안겨주었던 안동김씨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전세가 역전되어 그들이 흥선군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할 판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드디어 어린 왕 고종이 왕이 되자 흥선대원군이 국태공의 자리에 올랐다.

이날을 위해 상갓집 개라는 놀림을 당하고 안동김씨들의 바지가랑이 속으로 기어가는 치욕을 참고 견디었던 것이다.

국태공이 된 흥선대원군이 하루는 좌찬성 대감인 김병기의 집을 불쑥 찾아갔다.

김병기는 안동김씨가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핵심인물로 그의 아버지인 김좌근과 함께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었으며 흥선군에게 상갓집 개라는 별명을 붙인 인물도 다름아닌 그였다.

흥선대원군은 김병기에게 지난날의 수모를 되갚아 주기위해 단단히 벼르고 찾아갔던 것이다.

뼈다귀 대신에 푸짐하게 차린 술상이 나오고 김병기와 마주 앉아 술잔을 비우던 흥선대원군이 흐뭇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갑자기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냈다.

그리고는 안색을 바꾸며 김병기를 노려보더니 이런 고얀 놈, 독이 든 음식을 먹여 나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더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생부를 독살하려 했다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막다른 상황인데도 김병기는 오히려 태연자약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곧 진실이 밝혀지게 될 것이오니 노여움을 푸시라고 말하고선 바닥에 넙죽 엎드려 대원군이 토한 토사물을 남김없이 싹싹 핥아먹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세간의 상상과는 두 사람은 달리 매우 가깝게 교우했으며 뒷날 흥선대원군이 집정해 안동김씨 일파가 대부분 제거될 때도 김병기는 여전히 관직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뛰어난 재주는 어리석음으로 감추고 지혜는 드러내지 않되 명철함을 잃지 않으며 청렴은 오히려 혼탁함 속에 깃들게 하고 굽힘으로써 몸을 펴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건너는 배이며 몸을 보호하는 안전한 곳이 된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자신을 보호하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경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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