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9)-박지원

조선 영조·정조 때의 실학자이자 현실 비판주의 문학의 개척자인 박지원(1737~1805)5대 할아버지가 선조(宣祖, 조선의 제14대 왕)의 사위가 되었을 만큼 이름난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가 두 살 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그를 불운하게 태어난 손자라고 하여 늘 불쌍히 여겼다.

박지원은 서울 반송방 야동(冶洞, 서소문 밖 풀무골. 지금의 중구 순화동과 의주로 2가 일대)에서 태어나, 삼청동 백련봉 아래 이장오라는 인물의 별장에 세 들어 살았다. 얼마 뒤에는 백탑(白塔, 지금의 파고다공원) 근처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백탑 서쪽으로 옮겨가며 생활해야만 하였다. 더욱이 박지원의 나이 열여섯 살에는 그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고, 그의 형도 일찍 죽고 말았다. 그에게 남겨진 유산도 없었던 까닭에 그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박지원이 20~30대에양반전이나예덕선생 전과 같은, 세태를 비판하는 작품을 쓰게 된 것도 이런 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양반전에는 양반의 신분을 돈으로 사고 파는 세태와 양반의 횡포 및 허례허식을 풍자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예덕선생 전에는 천민 출신으로 인분을 다루는 똥장군 엄행수에게서 생활철학을 배우며 그를 흠모하는 양반 지식인 선귤자와 이에 반발해 그의 문하에서 떠나려 하는 제자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특히,예덕선생 전에서는 양반이라 텃세나 부리며 농업을 천하게 여기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런 박지원이 정조 임금에게 올린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신의 집안은 대대로 청빈(淸貧)하여 본디 농사지을 땅도 없었던 데다, 신은 서울에서 자라나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신의 할아비가 나라의 녹을 먹었는데, 신은 어렸을 적에 썩은 쌀을 뜰에 심고 싹트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한때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을 하며 촉망받던 재원(才媛) 박지원은 끝내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1771(영조 47) 황해도 금천의 골짜기인 연암골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가족들과 함께 아예 이곳에 터를 잡았다. 박지원의 호 연암(燕巖)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삶은 조상들의 청렴한 삶과 유람을 즐기는 그의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당시 실력자 홍국영과의 갈등도 한 몫 거들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세도정치가인 홍국영(1748~1781)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 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후에 정조대왕)까지 해치려고 음모를 꾸미자, 이를 잘 막아내어 세손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얻었다. 그는 세손이 정조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도승지에 올랐고,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원빈(元嬪, 으뜸 원)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했다. 이를 기반으로 세도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았던 바 그러한 홍국영과 마찰을 빚었으니, 박지원의 삶이 순탄했을 리 만무하다.

박지원과 절친한 친구 가운데 유언호란 사람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그는 영조 임금 시절 세손을 잘 보호하였고, 그 덕분에 세손이 정조로 등극한 후에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런 유언호가 연암골에 정착하기 직전의 박지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렸나? 그 자가 자네를 해치려 틈을 엿본 지 오래지만, 자네가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어 늦추어 온 것뿐이라네. 이제 복수할 사람이 다 없어졌으니, 다음 차례는 자네일 걸세.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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