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23)-루터

종교개혁의 선봉장인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광산업자인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사이에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는 처음에 농부였다. 그러나 막내 아들이 재산을 상속하게 되어 있는 당시의 제도 때문에, 근처의 광산에서 구리 캐는 광부로 직업을 바꾸어야 했다. 아버지는 독일 남부에 있는 평온하고도 작은 도시 만스펠트로 옮겨가 광부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광산업을 경영하면서 제법 성공한 축에 들었다.

하지만 루터가 태어날 무렵만 해도 그의 집안은 너무도 가난하여 어머니가 산에 가서 손수 땔감을 해 와야만 할 정도였다. 다행히 루터가 태어난 이듬해부터 살림이 펴기 시작하여 그의 아버지는 네 명의 부시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히기까지 하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교회의 타락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양심적인 기독교인으로서, 예를 들어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 만큼 엄격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자신의 진로 문제 역시 본인의 적성과 흥미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정해야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해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토록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의 일생에 크나큰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 날은 루터가 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던 중 집에 들렀다가 다시 대학이 있는 도시 에르푸르트(독일 중부 튀링겐 주의 수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22세 때인 150572, 슈토테르하임 근처 숲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루터의 몸 옆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그 순간 루터는 땅으로 거꾸러지면서 광부들의 수호 성인 이름을 소리 높이 불렀다.

성 안나여,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면 훗날 반드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엉겁결에 내뱉은 이 한 마디 때문에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은 달 17일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성 안나 앞에서 맹세한대로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24세가 되던 1507년에 사제(司祭)가 되었고, 1511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교로 옮겨 갔으며, 1512년에는 신학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1515년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열 군데를 감독하면서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하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종교개혁에까지 착수하게 되었으니. 사실 서양 중세 쳔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고 있을 뿐, 누구 한 사람 앞장서서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교회의 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용기있게 떨쳐 일어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이때 사제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기부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설교했다. 루터는 이러한 처사에 대해 151710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붙였다. 처음에는 교회 정문에 붙인 대자보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요원의 불길처럼 독일 국경을 넘어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고, 결국 그 유명한 종교개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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