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고집(1)-혜원과 칸트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부당(?)한 매를 맞고, 복도에 나가 두 손을 든 채 무릎 꿇고 앉아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달리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집에 돌아가고 사방에 어둠이 깔렸지만, 스스로의 자존심 때문에 끝내 손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한밤중 순찰을 돌던 늙은 소사의 눈에 띄어 그의 등에 업혀가면서도, 가지 않겠노라 발버둥을 쳤다. 그렇게 고집을 피우게 된 맘속에는 제자에게 혹독(?)한 벌을 주고서 그 사실마저 망각한 채 퇴근해버린 선생님, 그에 대한 원망이 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한 살을 더 먹은 해. 이번에는 잔뜩 화가 난 어머니의 손에 끌려 고향집의 간이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창과 출입문이 모두 함석으로 되어 있어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회초리를 맞기 시작했다. 처음 몇 대는 버티었다. 하지만 이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한번만 용서해 달라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매를 덜 맞는 유일한 길임을 터득한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철학자들의 모습 역시 어렸을 적 필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무모하게 보일만큼 고집을 피울 때도 있고, 간사하게 여겨지리만큼 나약할 때도 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장면도 있고, 부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 양심을 판 경우도 있다. 이번 호부터 그 철학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중국 동진 때의 승려 혜원(慧遠, 334~416)은 중국 장시성에 있는 아름다운 산 여산(廬山)의 동산(東山) 위에 동림사를 건축하였다. 그는 절 안에 특별히 한 칸의 방을 마련하였다. 그리고는 이름난 학자 123인을 불러들여 오직 염불에만 전념하도록 하니, 이로써 나무아미타불로 시작되는 염불 운동이 창시된 것이다.

그런데 혜원은 속세와 단절하기 위해 37년 동안 한 걸음도 여산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설령 손님을 배웅할 때에도 항상 절 앞의 냇물 호계(虎溪)의 언덕배기까지가 고작이었다. 중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도연명이 찾아왔을 때에도 예외는 없었다. 이에 도연명은 집에 돌아오는 즉시 현장의 감투를 벗어던지고,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유명한귀거래사(歸去來辭, 감독관의 순시 때 예복을 입고 배알하라고 명령한 데 화가 나,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적은 글. 천하의 명문)를 지었던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는 노인이 되고 난 후, 매우 엄격한 일정에 따라 생활을 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매일 아침 정각 5시에 일어났으며, 규칙적인 시간표에 따라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이어서 강의를 했다. 학술 논문을 작성하기 위한 스스로의 연구 시간은 주로 오전에 책정되어 있었다. 점심 식사 때에는 거의 언제나 손님을 맞이했는데, 칸트는 이때 철학을 제외한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어김없이 산책을 떠났는데, 한 번도 규칙적인 산책을 거른 적이 없었다. 프랑스의 루소가 쓴 교육소설에밀을 읽는데 열중하느라 며칠 집에서 나오지 않은 때를 빼고는. 그리하여 이웃에 살던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칸트의 움직임을 보고 시계 바늘을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산책에서 돌아온 칸트는 다시 연구에 몰두하였다가 밤 10시에 정확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160cm도 채 되지 않는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진 허약한 체질의 칸트였지만, 이상과 같은 규칙적인 생활로 인하여 나무랄 데 없는 건강을 누리면서 당시 독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두 배나 뛰어넘는 80세까지 장수하였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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