營鎭相較 必當一般

法鏡軒 김범진 법성포 거주
法鏡軒 김범진 법성포 거주

지금부터 230여 년 전인 1789년 윤오월 22일 자 선왕조실록에는 영광군에서 진량면(현 법성면)을 떼어내 법성진에 주어 독립된 진을 만들고, 법성진의 장을 고을 수령으로 삼아 영광군수와 동등하게 3()을 행사토록 하라는 정조의 어명이 기록되어 있다. , 법성면을 독자 행정권역으로 만들어 영광군수 보다 품계가 높은 법성첨사에게 나라의 정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사를 징집하는 권한과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 그리고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는 권한을 주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날 정조는 영광읍성과 법성진성을 서로 비교하여 반드시 동등하게 만들라(營鎭相較 必當一般-영진상교 필당일반)고 하였다.

▲ 축성 500주년 기념비 – 쌓은 지 5백년이 되는, 영광군 의회 김양모 의장 재임 기인 2014년에 세웠다. 필자가 글을 짓고 마천 김현웅이 썼다.
▲ 축성 500주년 기념비 – 쌓은 지 5백년이 되는, 영광군 의회 김양모 의장 재임 기인 2014년에 세웠다. 필자가 글을 짓고 마천 김현웅이 썼다.
▲ 법성포 진성마을 비 - 정조 때 법성진이 독진으로 승격되고, 독자행정 권역이 된 역사성을 담아정조의 어필 집에서 집자하여 새겼다.
▲ 법성포 진성마을 비 - 정조 때 법성진이 독진으로 승격되고, 독자행정 권역이 된 역사성을 담아정조의 어필 집에서 집자하여 새겼다.

 

정조가 무슨 까닭으로 영광군 관방이었던 법성진을 영광군에서 떼어내 독립된 진으로 승격시키고 성의 규모를 읍성이나 수영과 방어영 규모로 확장하였을까? 이유는 국가 재정의 근간인 조세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이는 정조가 동궁 시절부터 재위 24, 간 동안 저술한 글을 모아 편찬한 홍제전서에 잘 나타나 있다. 정조는 이 어제에서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조()가 있어야 한다. 나라에 조가 없으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초나라의 벼나 오나라의 찰벼가 저절로 올 리가 없다. 중종 때는 나주의 영산창을 없애면서 그것을 법성창에 소속시켰고, 숙종 때는 해운판관을 없애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도사가 겸임토록 했다.”, 조창과 조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실제, 조선시대 법성창에서 조세로 거둬들인 쌀과 콩이 국가 재정의 25~40%에 이르렀다니, 바꿔 이야기하면 법성면이 영광군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행정기관이 된 1789년부터 1895년까지, 106년 동안 국가 전체 소요 예산을, 많게는 4할까지 법성창에서 조달했다는 뜻이니, 정조의 이 어명은 당연한 결단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법성면에 나라의 중추기관인 조창이 자리한 시기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법성면 입암리에 부용창이 개설되었고, 고려사의 이 기록을 매향비와 고법성, 휘파람골, 세운골 잔등, 평고등, 백수읍 장산리 궁산, 둔전 등의 지명이 뒷받침하고 있다.

▲ 매향비 – 전라남도 기념물 제224호다. 영광군 의회 제7대 김양모 의장 재임시 지은 보호각 안에 존치하여 영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 평고등 – 고려 성종 때, 개창한 부용창을, 왜구의 침탈이 잦아 공민왕 때 대덕산 8부 능선에 있는 평고등으로 옮겼다. 대덕산 등산로 장미터널 옆이다.

 

과연 국가사적 요건을 갖춘 성인가?”

문화재법에 따르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고, 그 시대를 대표하거나 희소성과 상징성이 뛰어나야 한다. 법성진성은 지난 3차례의 학술대회에서 국내 저명한 석학들의 발제와 토론을 통해 이 요건들을 갖춘 성으로 확인되었다. 읍성 규모로 축성된 조선 유일의 수군 진성이 법성진성이며, 성내에 국가 최대 거창이 공존한 유일한 수군 진성이 법성진성이다. ,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법성면, 한 지역에서 900여 년 동안 조창 역사를 이어온 국내 유일의 나라 곡간이 법성창이다. , 수군 부대장에게 한 고을을 떼어 주어 다스리게 하고, 국방과 조창을 관장하게 한 최초의 수군진이 법성진이다. ,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군현, 축성 길이, 축성 기간과 함께 공사 관련자 실명이 새겨진 성 돌이 남아 있는 성이 법성진성이다. 이 성 돌은 공사실명제에 따라 시행되고 있는 현재의 공사 표지판과 흡사하여 500년 전의 공사 실명 표지판이라 할 수 있는 각자석이다. 이 같은 수군진성이 과연 우리나라에 어디 또, 있을까? 이보다 더한 역사적·학술적 가치와 시대를 대표하고 희소성과 상징성이 뛰어난 수군 진성이 대한민국에 어디 또 있단 말인가?

▲ 해남 성돌 – 이끼 낀 성돌 위에 「5백여 년 전인 1519년 9월 10일에 해남현 사람들이 약 33m를 쌓았다. 감독관은 임회고, 회계 책임자는 강영호다.」라고 새겨있다.

 

지난달에 있었던 학술대회에서도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의 규명과 함께 대회에 참가한 여러 석학이 국가 사적지정 요건은 충분하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이구동성으로 성터, 창지, 관아, 성문 등의 발굴조사가 미흡하여 영광군의 의지와 노력이 절실하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사적지정의 필수요건인 정밀기록화 사업을 하지 않았거나, 하고 있어도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맨눈으로 확인되는 성벽의 길이가 1,000m가 넘는데, 영광군은 잔존 성벽의 길이가 460m 정도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서쪽 성벽 팔각정 앞에 표지판을 세워 버젓이 공시하고 있는 점 하나만 보아도 부실함을 엿볼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기록화 사업은 사적지정에 꼭 필요한 사업으로 이를 통해 법성진성의 정확한 성벽 라인조사(GPS 조사병행), 잔존 구간 조사, 성돌 기록화(3D 스캔 필수), 훼손 여부 조사와 복원 방향 제시가 이뤄지기 때문이란다. , 전담 학예사의 배치도 아주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최소한 석사학위 이상, 한국사나 고고학을 전공한 학예사가 법성진성 관련 사업 관리를 전담하여, 관학 관련 전문가와 네트워크 형성 등을 총괄토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타, 학술자료집 발간을 포함하여, 객사나 동헌 같은 상징 관아 터를 우선하여 발굴하라는 조언과 함께 지금부터 꾸준히 동벽과 서벽 하단부와 서문지 정비, 문화재 보호지역 확대 및 훼손 이미지 불식을 위해 제월정 간이 정자 철거, 역사문화 콘텐츠 사업 강화(법성진성 형상도 보강, 군현 성돌 표시판 재설치 등), 법성포에 한시를 남긴 조선시대 저명인사의 시비 공원 조성 등을 준비하여 문화재청 현지실사를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대회 이튿날, 법성창 조운선의 해로 답사, 사석 방담에서 필자가 법성진 해문지역이 이순신 장군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으로 추정된다.”고 했더니 문화재법의 사적지정 기준에 인물의 기념과 관련된 유적도 비중 있는 항목이니 사료를 정리하여 다음에 있을 사적 신청서류에 꼭, 보완해 보라고 했다. 정유재란 때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아들을 만나려고 여수에서 서해 뱃길을 따라 상경하다가 바로 법성포 앞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이로부터 5개월 후, 장군은 울둘목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곧바로 법성진을 찾았다. 군량창이 있어 왜적의 최우선 공격 대상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던 장군이 법성진 선소에 이르렀을 때는 왜적들이 불을 지르고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이날 저녁 장군은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둔 법성포 해문 주변에 배를 정박하고, 명량대첩의 승전보를 어머니에게 고하고, 추모하며 배에서 하루밤을 잤다. 그리고 보름 후, 또다시 법성진에 들려 5일 동안 법성진성 아랫마을 선소마당에서 유숙했었다. 이렇게 법성포는 장군의 삶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곳이다. 참고로 정유재란 때 법성포는 왜적들이 인명 살상은 물론 수많은 사람의 코를 잘라간 비극의 현장이었고, 그 현장이 누문거리 인두겁 골목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임진왜란 때 충무공을 도와 조선의 의기로 불리는 내산월과 법성포 전래설화의 주인공인 일옹대가 같은 여인이라는 설까지 회자 되고 있다.

 

지자체장의 의지에 달렸다

법성진성의 국가사적 지정은 영광군의 정체성과 역사적인 가치는 물론 문화유산의 지속성이 보장되고 지역발전의 동력이 되어 지역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뿐만 아니라 어림잡아 600억에서 천억 정도의 국가 예산이 장기적으로 투입되어 복원사업이 진행된다. 최근에 여러 지자체에서 앞다투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법성진성도 지난 2008년부터 정치권의 단골 선거공약 사업이었고, 10여 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2019년에야 문화재청에 사적지정을 신청했지만, 추가 발굴 보완 사유로 유보되어 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시 신청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산확보가 안 돼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법성진성 사적 지정여부는 발굴성과에 달려 있다. 지난달 학술대회에서 토론 좌장인 이재운 교수가 역설한 법성진성의 사적지정 문제는 전적으로 지자체장에 달려있다는 조언을 명심하여야 한다. 마지막 관문인 발굴조사사업에 적게는 6억에서 많게는 10억 원이 소요된다고 하니 이 예산의 뒷받침은 필수고, 지자체장의 지속적인 의지와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더불어 국회의원, 군 의회 의장과 의원 모두가 합심하여 도와야 한다. 특히 김한균 군 의회 부의장과 정선우 자치행정 위원장은 만사 제쳐 놓고 예산확보에 나서야 한다. 지난 15여 년 동안 법성진성 사람들은 발굴조사를 하면 선거철이 다가옴을 알고 살았다. 이제 더 이상 선거철이 됐는가 보네하는 소리, 듣지 않고 사적지정의 낭보가 하루빨리 울려 퍼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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