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최근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영광의 문화예술 움직임이 나쁘지만은 않다.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후퇴하지는 않는 게 모든 분야의 모습이겠지만 문제는 과정이다. 공공미술관 한 군데 없는 고향에서 애향심을 에너지 삼아 분야를 지키는 문예인들이 나름 자랑스럽기도 하다. 옛말에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한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문화예술의 궁극 지향점은 즐김에 있을지도 모른다.

삶에서 나침반이 되어 저마다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은 바로 문화라는 개념이고, 문화는 인문(人文)과 결을 같이한다. 직역하면 사람의 무늬이다. ()은 글월 이전에 무늬이다. 그래서 문화(文化)는 사람의 무늬가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일컫는다. 사전에서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라는 인위성을 벗어나 사람의 무늬 즉, 사람의 삶 자체가 문화라는 개념이 훨씬 자연스럽다. 음식문화, 술 문화, 성 문화 역시 사람의 숨결을 품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예술 문화가 되고 넓게는 인문의 한 축으로 남는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모든 인간 행위가 개성을 품은 특색으로 존재함이 맞지 평가의 대상이 됨은 옳지 않다. 우리는 수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쉽게 순위를 매기고 줄을 세운다. 한국의 교육 제도가 가져온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출세는 성적순이다. 이른바 엘리트주의다. 입학하면서부터 은퇴를 할 때까지 순위가 매겨지고 순위는 자리를 결정한다. 결국, 철저하게 익숙해진 이러한 현상은 인문을 삼켰고 문화의 의미를 참살했다. 현 사회에서 인문을 바탕으로 삼은 참 문화인은 있을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밖을 보지 못하는 자만형 문예인이 너무도 많은 것 같은 느낌에 답답한 것 또한 또 다른 자만일지도 모른다. 요즘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을 만나는 일이 내 일과에서 제법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공을 한 전문가도 있고 생활 예술을 즐기는 아마추어도 있다. 모두 친구가 되길 원하고 주파수가 같으니 만남이 곧 즐김이지만 고질병인 실력 줄 세우기가 발목을 잡는다. 특히 전문가라는 자긍심으로 무장한 부류의 작품 평가는 무자비하다.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면 무지하다. 서두에 언급했던 즐김의 의미를 한참 벗어난 소위 전문가의 만용이다. 과연 넓은 의미의 인문에서 개성이라는 특색을 벗어난 실력의 평가가 따로 필요하기나 한 것인지 항시 의문이다. 전문가를 넘은 아마추어가 있고 입만 프로인 전문가가 있다. 타인을 향했던 자신의 평이 자신의 인격을 타격한다. 그래서 요즘 깨달은 사실은 새삼스럽게 다시 사람이다. 실력으로 만났다가 인성으로 멀어지고, 비전공의 가벼움으로 만났다가 인격으로 돈독해진다는 깨달음이다. 인문에는 특색이 있고 문화에는 인성이 있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작가여도 자만으로 가득하면 인문을 상실한 기술자만 남는다.

흔히 서예를 20년 했고 사진을 몇십 년 했다는 등의 말을 한다. 문제는 연차가 아니라 얼마나 집중적으로 했는가이다. 얕은 지식은 오히려 밖이 보이지 않는 굴레를 씌운다. 굴레 안에서 모두 안다는 착각은 위험하다. 지식이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자만은 무지이고 겸손은 자신의 무지를 안다는 의미이다. 인문과 문화에 서열은 없다.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문화와 예술만으로 이루어지는 인과관계는 적으며 겸손이라는 인품으로 만들어지는 관계는 굳고 깊이가 있기 마련이다. 요즘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자랑하고 활동을 내세우는 부류가 너무 많다. 비호감 자뻑족이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 보여도 사람이 비호감이면 인문의 세계에선 이미 실패한 작가이다. 인문에 전문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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