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운 시인·서예가·전 교장

2학년인 어느 학급에서 두 아이가 싸웠다. 뒤에 앉은 아이가 앞 아이의 등을 샤프 연필로 찌른 것이 발단이 되었다. 뒤 아이는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는데 매우 힘들어 했다.

그런데 드디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선생님이 둘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나무랐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문제는 그 부모들이었다. 가해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로 쫓아온 것이다. 왜 자기 자식을 나무랐느냐는 항의다.

담임선생님이 상황을 설명해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자기 자식은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자 담임이 그간 메모해 놓은 자료를 일정별로 보여주며 설명하자 약간 기가 죽기는 했으나 담임이 자기 아이를 미워해서 생긴 일이라며 수긍하지 않는다.

모든 부모는 다 그렇다.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눈으로 내 아이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육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다. 내 아이는 아무런 흠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교육은 시작될 수 없다. 어딘가 언젠가 잘못을 저지른다든가 실수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교육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식을 정확히 판단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좋은 대상은 담임이다. 또는 아이 친구들의 눈이다. 이러한 자원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부모가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다.

B의 말은 언젠가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다가,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걸 보게 되었어.’로 시작되었다. 그 고백은 결국 눈물로 얼룩졌는데, 그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아이가 끼리끼리 모여 장난을 치느라 정신없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혼자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는 바닥을 보며 걷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한 뼘 이상 큰 키 때문에 흐느적대듯 집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에서 그녀는 고독이란 단어 대신 왕따라는 말을 먼저 떠올렸다. 이후 그녀는 아이들의 하교시간이면 습관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백영옥 작가가 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라는 책에 나온 일화이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인 아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는 것이다.

오늘도 학교 앞은 북적거린다. 하교하는 아이들 사이에 자가용들이 들락거리고, 교문에는 학원차가 대기한다. 공부를 마친 아이들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또 혼자여야만 한다. 물론 다른 아이들과 함께라 하지만 협동이 없는 경쟁의 장소에서는 언제나 혼자이기 마련이다. 그들은 무한경쟁의 압박 속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기에 PC방이나 구석진 방 컴퓨터 앞에서 게임에 열중할 수밖에 없다. 위 아이처럼 혼자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게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예전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의 친구를 매우 소중히 생각했다. 친구가 아침에 학교 함께 가자고 자기 집에 들르면 밥은 먹었느냐?’ 꼭 묻고 하다못해 고구마 한 조각이라도 손에 들려주었다. ‘친구와 그렇게 싸우면 되겠느냐?’고 자기 자식을 나무랐고, 휴일이면 자기 집에서 밥 먹고 잠도 자고 가라고 말했다.

이런 사회가 바로 인간의 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삶이 아니겠는가. 내 아이가 더 잘해야 하고, 내 아이만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결국 다른 아이들은 내 아이보다 못해야 한다는 말이고, 모든 부모들의 이런 일념은 결국 모든 아이들이 못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모든 부모들이 내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잘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면 모든 아이들이 다 행복하지 않겠는가.

내 아이를 진정 사랑한다면 남의 아이를 사랑해 주어야 한다. 그 사랑은 다시 돌고 돌아서 내 아이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잘되면 내 아이가 친구들의 도움을 받지만 친구들이 못되면 내 아이는 질시의 대상이 되고,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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