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고집(7)-거듭되는 사직-이황(1)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학자로서 지금의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이식(李埴)7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으나 모친 박씨의 가르침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나갔다. 열두 살에는 숙부 이우(李偶)로부터논어를 배웠고, 14세 무렵부터 혼자 책 읽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한다. 스무 살을 전후하여주역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쳤고, 그 뒤부터 병이 많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22세 때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시는 기묘사화의 피바람 속에 조광조가 사형을 당한 이듬해로서, 유생들은 사기가 떨어져 도학을 기피하고 문학만 숭상하는 경박한 풍조가 생겨나 있었다. 그리하여 퇴계의 도학 공부는 유생들의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퇴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24세 때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연거푸 세 차례나 낙방하였다. 그 후 혼신의 노력을 쏟은 결과 3년 후에는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생원시에는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4년 후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9)에 임명되었다. 그 후 퇴계는 여러 관직에 승진, 발령되었다. 하지만 건강을 이유로 대부분 사양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구에만 뜻을 두었었다. 그러나 집이 워낙 가난했던 데다 어머니와 형의 권고도 있고 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던 것인데, 이에 대해 자기 자신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나중에 후회한 바 있다. 그는 간혹 속세를 떠나 독서를 즐기며 성현(聖賢)의 도를 찾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곤 하였다.

43세 때인 1543년 성균관사성(3품 관직)으로 승진하였으나 성묘를 핑계 삼아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을사사화 후, 몸이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였다. 46세 되던 해인 1546(명종 1)에는 부인 권씨를 잃고 나서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던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바꾸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퇴계는 그 스스로 아주 물러나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官界)가 싫어 가급적 외직(外職)을 지망하였다. 48세 되던 해(1548)에는 충청도 단양 군수가 되었다. 여러 관직을 사양하던 퇴계였지만, 이 자리만큼은 특별히 희망하였다. 그러나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풍기 군수로 전임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단양군이 감사(監司, 오늘날의 도지사)가 된 그의 넷째 형 이해(李瀣)의 통솔 지역인 충청도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49세 되던 해(1549)에는 병을 이유로 경상도 감사에게 사직원을 냈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세 번이나 올렸어도 그에 대한 답변이 없자 행장을 꾸려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해에는 허락 없이 직책을 버렸다하여, 감사로부터 2계급 강등처분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퇴계의 서쪽 양지바른 곳에 한서암(寒栖菴)이라는 집을 지어 그곳에서 조용한 은둔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독서와 사색으로 나날을 보내었다. 벼슬살이를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학술에 몰두하는 편이 퇴계로서는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물론 사화(士禍)’라 불리는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던 당시의 사회 환경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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