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고집(8)-50번의 사퇴서-이황(2)

지난호 이황의 거듭되는 사직에 이어 오늘은 두 번째 사퇴이야기이다. 퇴계 이황이 52세 되던 1552년에는 성균관 대사성(3품 당상관)에 임명되었다. 1556년에 홍문관 부제학, 1558년에 공조참판(차관급)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였다. 1543년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무려 스무 번에 이르렀다.

퇴계는 60세 때인 1560년 경북 안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 동안 독서와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사이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에 나아오라 여러 번 권하였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당시 독서당(讀書堂)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걸출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운 전문 독서연구 기관이었다. 독서당에 대한 왕들의 총애와 우대는 지극하였던 바, 이 무렵 명종 임금은 독서당에 들러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 그리고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 현인을 초대하였는데도,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라는 뜻의 제목으로 시를 짓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몰래 화공(화가)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한 다음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퇴계를 흠모했다고 한다. 그 뒤 퇴계를 자헌대부(2), 공조판서(장관급), 대제학(2품 벼슬)에 임명하며 시도 때도 없이 초빙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그때마다 사양하면서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황제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퇴계 이황의 상경(上京)을 간절히 바라게 되고, 이에 어쩔 수 없이 퇴계는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명종이 갑자기 죽고 선조가 즉위하게 되었던 바, 선조는 퇴계를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身病) 때문에 부득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퇴계는 68세의 노령에 대제학, 지경연(2품 벼슬)의 중책을 맡아 선조에게무진육조소(戊辰六條梳, 왕으로서의 처신에 대한 권고의 글)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千古)의 격언으로 간주하여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68세의 노학자 퇴계는 17세의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왕으로서 알아야 할 학문(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10개의 그림으로 간략히 정리하여 올리기도 했다.

퇴계는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제수 받았다. 이 자리는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흠이 없는 석학만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로서 본인이 물러나지 않는 한 평생 종신직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나이도 70에 가까워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는 선조 임금의 간절한 권유를 뿌리치고 귀향을 감행하였다. 그가 귀향하기 위해 뚝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을 적에 수백 명의 후배, 제자들이 몰려나와 눈물로 이별했다고 한다.

그 후로 퇴계는 다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다음해(1570) 11, 종가(宗家)의 제사 때 무리를 해서인지 병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하였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은 자세로 조용히 역책(易簀: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퇴계의 말년 관직생활은 그야말로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만이 계속되었다. 52세부터 70세까지 18년 동안 50회의 사퇴서를 냈고, 특히 정3품 이상의 벼슬은 실제로 받아들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어머니는 살아 있을 때에 중앙의 고관벼슬을 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한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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